지구관청일기 ()

지구관청일기
지구관청일기
근대사
문헌
1874년 5월 3일부터 1882년 6월 9일까지 지구관청에서 군량의 공급 · 군사의 이동과 배치를 기록한 일지. 관청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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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74년 5월 3일부터 1882년 6월 9일까지 지구관청에서 군량의 공급 · 군사의 이동과 배치를 기록한 일지. 관청일기.
서지적 사항

불분권 9책. 필사원본.

편찬/발간 경위

1874년(고종 11) 5월 3일부터 1882년 6월 9일까지의 지구관청일기가 무위소(武衛所)에 의해 9책으로 편집된 것이다.

내용

1873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아 친정을 하게 된 고종은 궁궐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1874년에 훈련도감의 군사 중에서 건장하고 걸음이 빠른 자들을 뽑아다가 내영(內營)을 창설하고 ‘무위소’라 이름하였다.

무위소는 장용위(壯勇衛)와 총위영(總衛營)의 제도를 본받은 것으로, 처음에는 궁궐의 숙위(宿衛)만을 전담하다가 이후에는 수도방위 업무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무위소를 통괄하는 최고의 책임자는 무위도통사(武衛都統使)로서 금위대장이 겸임하였다.

그리고 파수(把守)에 대한 감독이나 군사의 인솔 및 군수품 수송 등에 관한 일들은 특별히 뽑혀온 지구관(知彀官)이 전담했으며, 이 지구관이 있는 곳을 ‘지구관청’이라 하였다.

지구관청에는 매일 입직하는 지구관이 파수병의 근태를 살피고 외부인의 출입을 점검하는 등 궁궐 수비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이 일기에는 궁궐의 숙위를 포함한 종묘(宗廟)·사직(社稷)·영희전(永禧殿)·경모궁(景慕宮)·경복궁(慶福宮)·경희궁(慶熙宮) 등 모든 궁전의 적간(摘奸)에 대한 기록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임금의 전좌(殿座)·동가(動駕)·친전향(親傳香) 때의 시위 상황, 궁중행사 시의 경비관계, 대장 이하 군관들의 인사문제, 군졸의 입번(入番)·출번(出番)·전령(傳令) 등에 관한 사항, 사건을 보고하는 첩목(帖目) 등이 수록되었다.

또한 시위군(侍衛軍)에게 지급된 물목기(物目記)나 임금 행차 때의 어가(御駕)를 따르는 도통사·제조·종사관·장관·감관·지구관·서리·고직 등에게 계강환(桂薑丸)·강분환(薑粉丸)·오매환(烏梅丸)·사당환(砂糖丸)이 궁중으로부터 각각 내려진 일이 기록되어 있다.

역시 궁중으로부터 지구관의 인솔 하에 양화진방수(楊花津防守) 및 각처의 방수군(防守軍)에게 수송된 청심원(淸心元)·제천단(濟泉丹)·광제환(廣濟丸) 등 구급약이 포함된 우척(牛隻)·백하해(白鰕醢)·침채(沈菜)·토장(土醬)·태좌반(太佐飯)·북어(北魚)·청장(淸醬)·승혜(繩鞋) 등의 군수품과 영산현감(靈山縣監)·의성현령(義城縣令)·김해부사(金海府使)·삼가현감(三嘉縣監) 등 지방관으로부터 올라온 군수물을 적고 있다.

그리고 전 판관(判官) 문의열(文義說)이 개인 자격으로 납품한 황우(黃牛)·청장·토장의 수량까지도 기록해 놓고 있다.

그리고 무위소에서 장궁(長弓)·후궁(帿弓)·장전(長箭)·편전(片箭)·통아(筒兒) 등 무기를 제작한 일, 연말에 달력을 하사한 일, 궁중에서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에 솔씨를 나누어 주어 심게 한 일도 기재되어 있다.

제조·대장·별장의 상사(喪事)에 의례적으로 지원되는 담지군(擔持軍)·연번군(烻燔軍)·시배군(侍陪軍)의 인원수와 사롱(紗籠)의 수량 등을 기재하였다. 또한 군향색종사관(軍餉色從事官)·선기별장(善騎別將)·좌사파총(左司把摠)·우사파총(右司把摠)·좌선기장(左善騎將)·우선기장(右善騎將)·초관(哨官) 등의 망단자(望單子)도 싣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1책에 보이는 의정부에서 새로 정한 ‘궐내파수군지방지수(闕內把守軍支放之需)’이다. 이것은 궐내 파수군에게 봉급으로 지출된 예산이라는 뜻이다.

혜청(惠廳)·별영(別營)·훈련도감·진무영(鎭撫營)·병조·금위영·어영청·사역원(司譯院) 등으로부터 납입된 것이 미(米) 3,373석 9두 5승, 전(錢) 3만 5000냥, 목(木) 163동(同) 38필(疋) 30척(尺) 2촌(寸), 포(布) 55동(同)이었으니, 당시 궁궐 경호에 따른 예산규모를 대략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또한 8책에 실린 ‘서총대응시질(瑞葱臺應試秩)’이라는 것도 참고할 만하다. 이것은 바로 별장·파총·초관·선기장·감관·별군관·지구관·교련관·별무사·대령포교(待令捕校)·별초군관(別抄軍官)·무사선기대(武士善騎隊)·무예별감(武藝別監)·장예별감(壯藝別監)·별대장(別隊將)·별대마병(別隊馬兵)·군직선전관(軍職宣傳官)·사복(司僕)·사승(司乘)·사알(司謁)·사약(司鑰)·구종(驅從)·견마(牽馬)·배마부(陪馬夫)·춘계방사령(春桂房使令)·기무아문사령(機務衙門使令)·북한교졸(北漢校卒)·승교졸(僧校卒)과 용진(龍津)·연희(連喜)·화도(花島) 등 3진(鎭)의 교졸들의 유엽전(柳葉箭)·편전·조총(鳥銃)에 의한 시취방법(試取方法)을 적은 것이다.

역시 8책에 수록된 통리기무아문에 의해 정해진 ‘각군문변통절목(各軍門變通節目)’은 바로 종래의 무위소·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총융청·용호영·호위청을 병합해 2영(營)으로 만들기 위한 약정이다. 이 절목은 이두(吏讀)를 섞어 적었는데, 조목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모든 군문의 연혁·증감은 비록 전례와 동일하지 않음이 있으나 지금 각 영의 일시변통은 경장(更張)의 큰 것에 해당하니, 삼가 하교에 의해 통솔·전제의 방법을 가지고 무위소·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총융청·용호영·호위청을 병합해 2영으로 만들 것,

② 무위소·훈련도감·용호영·호위청을 합해 1영으로 만들어서 ‘무위영(武衛營)’이라고 칭하고, 금위영·어영청·총융청을 합해 1영으로 만들어서 ‘장어영(壯禦營)’이라 칭하되, 장신(將臣)은 대장으로 칭하고, 인신(印信)은 새로 제작한 뒤에 옛 인신은 도로 거둘 것을 해당관서에 분부할 것,

③ 장신이 명소(命召)만 차고 부신(符信)은 차지 않은 것에 대해 논란이 없지 않은 바, 지금 이 변통을 할 때에는 마땅히 이정(釐正)해야 하니, 국초의 규제를 참고해 명소·호부(虎符)·전령패(傳令牌)를 차게 할 것,

④ 두 영[무위영·장어영]의 도제조(都提調)는 대신 중에서 맡으며, 무위영의 제조는 경리사(經理事) 중에서 차임하고 장어영의 제조는 병조판서가 으레 겸임하게 할 것,

⑤ 각 영을 지금 이미 합설했으니, 순검(巡檢)하는 일은 두 영이 돌아가면서 거행하게 할 것, ⑥ 미진한 조건은 추후에 마련할 것 등이다.

또한 9책의 임오년 4월 10일조에는 희정당(熙政堂)에서 청나라 사신을 접견할 때 지구관의 지휘 하에 시위하던 일이 보인다.

14일조에는 대관(大官) 조영하(趙寧夏)가 영국 사신을 접견할 때 대궐 아래에서 인천 제물포에 이르기까지 말을 잘 타는 군대인 곧 선기대와 척후(斥候)의 임무를 띠고 말을 탄 군사인 곧 당마(塘馬)를 가지고 삼엄하게 경비를 펼칠 준비를 하고 있는 과정에 대한 기록도 보인다.

의의와 평가

지구관청일기는 조선 말기의 정세 변화와 함께 개혁된 궁궐의 수비 방법이나 각 영의 통합에 의한 군제 개편의 면모를 살피는 데 좋은 자료이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순종실록(純宗實錄)』
『지구관청헌』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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