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9년 1월 19일 충청도 괴산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현(子賢)이다. 호는 간정(侃亭)·상현(尙玄)·무능거사(無能居士)·상현거사(尙玄居士) 등을 썼다. 아버지는 이원긍(李源兢)이다. 대한제국기에 한성법어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일제강점기에 능인보통학교 교장, 조선불교회 상무이사, 조선사편수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43년 4월 12일 사망했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1887년 영어학교, 1892년 한어(漢語)학교, 1895년 관립한성법어(法語: 프랑스어)학교를 차례로 입학하여 졸업하였다. 1895년 11월 농상공부 주사(主事)가 되었다. 1897년 11월 한성법어학교 교관으로 프랑스어를 가르치면서 1902년 칭경예식(稱慶禮式)사무소 위원과 1903년 2월 해서사핵(海西査覈)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06년 6월 국문일정법(國文一定法) 의견서를 학부에 제출하였고, 10월 한성법어학교 교장으로 승진했다. 1907년 2월 일본에 농상무성 사무를 시찰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며, 7월 국문연구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통감부의 학제개편에 따라 1908년 1월 관립한성외국어학교 학감으로 취임해 한일병합 후인 1911년 학교가 폐쇄될 때까지 학감으로 재임했다. 1912년 사립능인보통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으며,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5년 불교진흥회 간사와 이사에 위촉되었고 그해 3월 『불교진흥회월보』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았다. 1915년 11월 다이쇼[大正]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6년 『불교진흥회월보』를 개칭한 『조선불교계』 편집인 겸 발행인, 1917년 3월 『조선불교총보』 편집인 겸 발행인, 같은 해 10월 불교옹호회 이사를 맡았다. 1918년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를 출판했다.
1918년 2월부터 10월까지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위원회 촉탁에 위촉되어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협력했다. 같은 해 12월부터 중추원 조사과 촉탁, 1920년 7월부터 1923년 12월까지 중추원 편집과 촉탁으로 재직하면서 조선의 옛 관습 및 제도를 조사했다. 1920년 12월 조선불교회 상무이사를 맡았고, 1921년 11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수관에 임명되었다. 1922년 11월 조선총독부 교과서 조사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2월 식민사관에 입각해 『조선사』를 편찬하는 조선사편찬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1923년 조선사편찬위원회 석상에서 한국사 속에 발해사를 포함시키고 건국신화를 실어야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1925년 7월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되어 1943년 사망할 때까지 종사하였는데, 『조선사』 편찬을 비롯하여 한국 민족문화와 관련한 각 자료를 정리·연구한 책들을 집필하였다. 1928년 6월 조선총독부 임시교과서조사위원회 위원, 1929년 8월 조선박람회 사무위원, 1930년 8월 청구학회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28년 11월 쇼와[昭和]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1929년 1월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1931년 박승빈(朴勝彬)·오세창(吳世昌) 등과 더불어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 설립에 참여했다. 1932년 5월 이왕직 실록편찬사료 수집위원, 1933년 12월 조선총독부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 위원 겸 제2부원, 1934년 고적조사위원회 위원, 1935년 2월 임시역사교과용도서조사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1936년 1월 심전(心田)개발위원회에 참석했고, 12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이 사회교화 진흥공작을 도모하는 간담회에 출석했다.
1939년 일본기원 2600년을 기념하는 한시 「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을 지었고, 이 시에 김기수(金琪洙)가 곡을 붙여 아악창작곡 공모전에 출품해 당선되었다. 이 곡은 1940년 11월 부민관에서 일본기원 2600년 기념 봉축연주회에서 연주되었다. 1940년 4월 천황이 『조선사』 편찬의 공로로 은배를 주었다. 「숭검출사(崇儉黜奢) 존본취리(存本取利)」(『매일신보』1940.12.15.)와 「이조 초의 권농윤음(勸農綸音)」(『매일신보』1941.9.26.)과 같이 친일협력을 독려하는 글을 발표했다. 1941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 문화부 문화위원, 4월 국민연극연구소 일본사 강사, 10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이능화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9·20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2: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257∼295)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이능화의 한국학 저술은 선구적이고 학술적으로 가치가 뛰어난데, 1918년 자비로 출판한 『조선불교통사』가 가장 두드러진다. 1923∼24년에 조선사학회에서 간행한 『조선사 강좌 특별강의』 중에서 「조선불교사」를 집필하였다. 주요 저서로 『조선신교원류고(朝鮮神敎源流考)』, 『조선상제예속사(朝鮮喪祭禮俗史)』, 『조선유교지양명학(朝鮮儒敎之陽明學)』, 『이조시대경성시제(李朝時代京城市制)』,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 『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 『조선기독교급외교사(朝鮮基督敎及外交史)』 등이 있다.
『조선해어화사』는 기생을 주제로 하여 그들의 생활 모습과 주변에 관한 자료를 집대성한 것이다. 통혼·가족·수과(守寡)·복장·교육·연중행사 등을 중심으로 정리한 『조선여속고』와 함께 우리나라 여성사의 개척적인 저서로 『조선불교통사』와 함께 1968년에 재판 영인되었다. 『조선기독교급외교사』는 능통한 프랑스어를 바탕으로 달레(Claude Charles Dallet)의 『조선교회사』를 이해한 뒤 조선시대 문헌을 통해 기독교사의 체계를 정리한 이 분야 최초의 저작이다.
또 『춘향전』을 한시(漢詩)로 풀이한 『춘몽록(春夢錄)』을 비롯하여 『조선유학급유학사상사(朝鮮儒學及儒學思想史)』, 『조선신화고(朝鮮神話考)』, 『조선십란록(朝鮮十亂錄)』, 『조선의약발달사』, 『조선사회사』, 『조선도교사』 등도 저술하였다. 이들 유고는 1959년 동국대학교에서 영인·간행한 바 있는 『조선도교사』를 제외하고 모두 한국전쟁으로 산일(散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