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성(靈城). 광주(廣州) 출신. 자는 가택(可宅), 호는 불우헌(不憂軒) · 다헌(茶軒) · 다각(茶角). 아버지는 진사 정곤(丁坤)이다. 한편, 『국조방목(國朝榜目)』에는 정인(丁寅)의 아들로 되어 있다.
1429년(세종 11) 생원이 된 후 여러 번 과시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1437년(세종 19) 세종이 흥천사(興天寺)를 중건하기 위하여 토목공사를 일으키자 태학생(太學生)을 이끌고 부당함을 항소하다가 왕의 진노를 사 북도(北道)로 귀양을 갔다.
그 뒤 풀려나 태인(泰仁)으로 가 집을 짓고 거처하며 집의 이름을 불우헌이라고 지었다. 불우헌 앞 비수천(泌水川) 주변에 송죽을 심고 밭을 갈아 양성을 힘쓰면서 향리의 자제들을 모아 가르치는 한편으로 향약(鄕約)계축(契軸)을 만들어 향리의 교화에 힘썼다. 한편, 정극인은 원래 광주(廣州) 두모포리 태생인데, 처가가 태인인 까닭으로 이곳에 우거하게 된 것이다. 송세림(宋世琳)의 「동중향음주서(洞中鄕飮酒序)」 발문에도 애초의 태인 사람이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다.
1451년(문종 1) 천거로 광흥창부승(廣興倉副丞)이 되어 6품(六品)을 받았다. 이어 인수부승(仁壽府丞)으로 있다가 1453년(단종 1) 한성판관 성순조(成順祖)의 권유로 전시(殿試)에 응시하여 김수령방(金壽寧榜) 정과(丁科) 13명에 들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전주부교수참진사(全州府敎授參賑事)로 있다가 그 직을 사임하고 태인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 해 12월 조정에서는 인순부승록(仁順府丞錄)으로서 좌익원종공권(佐翼原從功券) 4등을 내렸다. 이로부터 다시 출사하여 약 10년간, 네 번의 성균관주부, 두 번의 종학박사(宗學博士)를 지냈고, 사헌부감찰 및 통례문통찬(通禮門通贊) 등을 역임했다.
1469년(예종 원년) 69세 때 태인현 훈도로 있다가 사간원헌납으로 다시 옮겨 조산대부 행사간원정언(朝散大夫行司諫院正言)이 되었다. 또 불교를 배척하는 논의를 하다가 하옥되기도 했으나 오래지 않아 석방됐다.
1470년(성종 1)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관직을 사양하고 귀향해 후진을 양성했다. 1472년 벼슬에 뜻을 접고 향리의 자제를 열심히 가르친 공으로 3품 산관(散官)이 내려지자 이에 감격해 「불우헌가(不憂軒歌)」 · 「불우헌곡(不憂軒曲)」을 지어 송축했다. 1481(성종 12)년 81세의 나이로 죽었다.
비록 환로의 영달은 없었으나 선비로서의 청렴한 삶을 고수했고, 검소하며 소박한 삶을 살았다. 문학에 특출한 재능을 보여 최초의 가사 작품으로 알려진 「상춘곡」과 단가(短歌) 「불우헌가」, 경기체가(景幾體歌)의 「불우헌곡」 등을 지어 한국시가사에 공헌했다. 특히 「불우헌가」 · 「불우헌곡」은 모두 우리말을 사용하여 지음으로써 국문학사에 큰 의미가 있다.
문집으로 『불우헌집(不憂軒集)』2권 1책이 전한다.
예조판서 겸 지춘추관성균관사에 추증됐으며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