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의 문집인 『불우헌집(不憂軒集)』에 전한다. 작자가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 태인에서 자제들을 교육하고 있을 때, 성종은 그에게 삼품산관(三品散官)의 관작을 내리고, 전라도관찰사로 하여금 때때로 혜택을 베풀도록 하였다.
이 은전에 감격한 그는 경기체가인 「불우헌곡(不憂軒曲)」과 이 「불우헌가」를 지어, 성군의 만수무강을 송축하였다.
내용은 관리의 세계에서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는데, 이러한 은혜와 광영을 입고 보니, 이 영광스러운 모습을 어서 속히 임금에게 보이고 싶다는 것이다.
형식은 재래의 송축가형식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그 연원은 고려시대의 진작악조(眞勺樂調)인 「정과정곡(鄭瓜亭曲)」에서 유래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것이 조선시대 「유림가(儒林歌)」와 「신도가(新都歌)」 등의 송축가를 거쳐 「불우헌가」에까지 연계된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음보·자수(字數)·곡태(曲態)가 「정과정곡」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식은 정철(鄭澈)의 「장진주사(將進酒辭)」를 거쳐 후세의 가곡(5장으로 칭하는 것)으로까지 발달한다.
한문현토식 문투에다 반복어이자 감탄어형인 ‘뵈고시라’와 ‘하고 만코 ᄒᆞ니이다’를 삽입시켜 짓고, 그 내용이 스스로의 현명함의 과장, 그리고 영예를 노래하였다는 점에서 진부한 느낌과 빈축을 산다. 그러나 형식상으로는 고시가의 형식적 발달과 그 계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