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극인의 문집인 『불우헌집』 권2에 전한다. 정극인은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 태인에서 안빈낙도하는 생활을 하면서 향리의 자제들을 힘써 교육하였다. 이로 인하여 성종으로부터 삼품(三品)의 작위와 더불어 그 지방 관찰사로 하여금 때때로 혜택을 베풀도록 하는 은전을 받았다. 이에 감격하여 「불우헌가」와 함께 이 노래를 지어 성군(聖君)의 만수무강을 축원하였다고 한다.
전 6장으로 되어 있으며 제6장 마지막의 낙구(落句)를 독립된 장으로 본다면 모두 7장이 된다. 제1장에서는 벼슬을 그만두고 자연에 묻혀 거문고와 책과 바둑과 장기를 즐기며 소일하는 모습을 읊었다.
제2장은 향리의 소년들과 타향에서 공부하고자 찾아온 학동들을 모아놓고 교육하는 즐거움을 노래했다. 제3장은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남에 임하여 베푼 왕의 망극한 은덕을 회고하는 모습을 읊고 있다.
제4장은 태평성대에 춤추고 노래하며 왕의 성덕을 기리는 모습을 노래했으며, 제5장에서는 자기분수를 지켜 안빈낙도하는 심경을 표현하고 있다. 제6장은 삼품산관(三品散官)의 유서를 받고 성은에 감격하는 모습을, 낙구 제7장은 작자 자신의 생활의 즐거움을 노래로 지어 세상근심을 떨쳐버리는 모습을 각각 노래하였다.
이 노래는 고려 고종 때의 「한림별곡(翰林別曲)」의 형식을 본받고 있는데, 다만 제6장 끝에 독립된 낙구를 가진다는 점에서 「한림별곡」과 크게 구별된다. 이 같은 현상은 그 유래를 권근(權近)의 「상대별곡(霜臺別曲)」에서 찾을 수 있다.
「불우헌곡」보다 약 70년 앞선 「상대별곡」의 형식은 고려 때 「한림별곡」의 형식과 같으나, 끝에 낙구가 첨가된 것이 다를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불우헌곡」의 낙구는 「상대별곡」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불우헌곡」의 형식은 김구(金絿)의 「화전별곡 花田別曲」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낙구가 첨가된 「불우헌곡」의 형식은 경기체가 형식의 변천과 그 계보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료이다. 동시에 「불우헌곡」 이전의 조선시대 경기체가가 악장이라는 국가적 소용이었다면 「불우헌곡」은 개인적 소용으로 변모한 첫 작품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