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에 정극인(丁克仁)이 지은 가사. 작자의 문집 ≪불우헌집 不憂軒集≫에 전한다. 작자가 치사 후 태인에 돌아와 자연에 묻혀 살 때 지은 것으로, 속세를 떠나 자연에 몰입하여 봄을 완상하고 인생을 즐기는 지극히 낙천적인 노래이다. 2음보 1구로 계산하여 총 79이며 3·4조, 4·4조, 2·3조가 주조를 이룬다.
내용은 서사·춘경·상춘(賞春)·결사 4분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제1단은 산림에 묻혀서 자연을 즐기는 자신을 풍월주인(風月主人)으로 노래하였고, 제2단은 봄경치를 완상하며 흥취에 젖어든 정황을, 제3단은 산수구경을 하며 술에 취한 즐거움을, 제4단은 자연귀의와 안빈낙도를 노래하였다.
내용 전개에 있어 ① 풍월주인, ② 가려춘경(佳麗春景), ③ 소요음영(逍遙吟咏), ④ 산수구경, ⑤ 음주자적(飮酒自適), ⑥ 등고부감(登高俯瞰), ⑦ 수분행락(守分行樂)과 같은 장면배합이 잘 되어 한결 상춘의 흥취를 고양시켜 준다. 조사법(措辭法)이 자연스럽고 표현기교 또한 아려(雅麗)해서 양반가사 중 일품으로 꼽고 있다.
<상춘곡>은 그간 사적 고찰은 물론, 작가연구, 내용 및 형식분석, 문체연구 등 다방면에 걸쳐 활발히 연구, 진행되어 왔다. 그 결과 이 가사는 몇 가지 문제가 제기되어 학계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우선 이 가사의 사적 위치의 문제이고, 다음은 작자의 문제이다. 전자는 이 가사가 종전의 학설대로 가사문학의 효시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인데, 그것은 최초의 작품으로서는 그 형식이 너무 정제되어 있다는 점과, 또 어사(語辭)가 15세기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들고 있다.
때문에 이병기(李秉岐)·정병욱(鄭炳昱) 등은 고려 말 나옹화상(懶翁和尙)의 작으로 알려진 <서왕가 西往歌>를 그 효시로 추정하기도 한다.
다음 작자에 대하여는 ① 임진왜란 전후의 문헌적 방증이 없고, ② 구사된 시어들이 정극인의 다른 시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③ <상춘곡>의 사상과 정극인의 사상과는 일치하지 않고, ④ 정극인은 <상춘곡>을 창작할 만한 능력이 없으며, ⑤ 언어적 표현도 조선 초기의 것이 아니고, ⑥ 음보나 음수율, 또는 감정표현의 기교도 믿을 수 없다는 점을 들어 정극인 작자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신중론을 펴는 견해와 종전의 설을 그대로 고수하려는 견해도 있다. 전자는 문헌상으로나 자료면에서 정극인 작이 아니라는 증거가 없는 한, 아직 그 작자나 제작 연대에 대해서 속단을 내리는 것은 삼가야 할 것이라고 하고, 후자의 경우는 ① <상춘곡>의 내용은 ≪불우헌집≫의 행장과 시문에 부합되고, ② 제작 당시 1470년(성종 1), 즉 작자 70세 때 치사환향 때의 귀거래사적 심정과 그 사의(詞意)가 어울리며, ③ ≪불우헌집≫의 사료적(史料的) 신빙성도 충분하다고 하여 종래 정극인의 제작설을 재확인하고 있다.
한편, 상례와 같은 의문을 제기하는 편에서도 ① 3·4조 우세의 음수율과, ② ≪불우헌집≫ 체재의 신빙성, ③ 기(記)·서(序) 및 그 밖의 시문과의 다소의 조응성 등 몇 가지를 들어 정극인 작자설을 전연 배제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상례의 의문은 하나의 문제제기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작품은 대우법을 사용한 구성의 묘라든지 자연탄미의 선명한 주제, 유연한 율조와 우아한 풍류미 등으로, 후세에 차종 가사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아 그 가치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