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 때 정철(鄭澈)이 지은 가사. 4음보 1행으로 따져 48행이며, 기본 율조는 3·4조가 우세하다. 작품 연대는 정철의 나이 50세(1585)에서 54세(1589) 사이로 추측되고 있다. 군왕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은유적으로 노래하였다.
이 작품은 ≪송강가사 松江歌辭≫라는 판본에 수록되어 있다. ≪송강가사≫에는 이외에도 <관동별곡 關東別曲>·<사미인곡 思美人曲>·<성산별곡 星山別曲> 등의 가사와 아울러 그의 시조작품 여러 편이 함께 실려 있다.
≪송강가사≫는 성주본(星州本)·이선본(李選本)·관서본(關西本) 등의 이본이 현전하고 있다. 그 밖에 관북본(關北本)·의성본(義城本)·황주본(黃州本) 등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전하는 세 이본간의 표기에는 약간씩 차이가 있다. 가사의 내용 전개는 대화체로 되어 가사문학 구성에 있어 새로운 면을 보여준다.
서두는 먼저 갑녀(甲女)로 표시할 수 있는 시중의 한 화자가 을녀(乙女)로 표시할 수 있는 여인에게 “뎨 가ᄂᆞᆫ 뎌 각시 본 듯도 ᄒᆞᆫ뎌이고”라고 주의를 환기시킨다. 이어서 천상 백옥경을 어찌하여 이별하고 해가 다 저물어가는 날에 누구를 보러 가느냐고 묻는 데에서 두 여인의 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에 을녀는 “아, 너로구나 내 이야기를 들어보게. 임이 예쁘지도 않은 나를 사랑하여 그만 내가 너무 버릇없이 굴다가 임에게 미움을 사게 되었으니 그것은 조물의 탓일 것일세.”라고 하면서 자탄(自歎)한다.
을녀의 말을 듣고서 갑녀는 “그게 아니라 임에게 맺힌 일이 있다.”라고 하여 을녀의 생각을 고쳐 준다.
그러나 을녀는 “나도 임을 뫼셔 보아 임의 사정을 잘 아나 지금 임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며, 독수공방하는 내 신세도 처량하며 차라리 낙월(落月)이나 되어 임의 창밖에 비추어 보고 싶다.”고 토로한다. 이에 대하여 갑녀는 “달빛도 좋지마는 궂은 비나 되라.”고 권하는 것으로 가사의 끝을 맺고 있다.
이러한 대화의 분석은 연구자에 따라 다소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김사엽(金思燁)이 갑녀의 사설, 을녀의 사설, 갑녀의 사설로 삼분하여 <속미인곡>의 구조를 설명하려 한 것이 그러한 예의 하나이다.
이러한 대화체의 가사에 있어 갑녀와 을녀는 각기 작자의 분신이면서 작자가 의도하는 바를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등장시킨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갑녀는 을녀의 하소연을 유도하며 더욱 극적이고 효과적으로 가사를 종결짓게 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속미인곡>은 제목에 ‘속’자가 있어 같은 작자가 지은 <사미인곡>의 속편처럼 생각되는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보다는 다른 측면에서 임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읊었으며, 그 표현이나 지은이의 자세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사미인곡>은 평서체인 데 비하여 <속미인곡>은 대화체이다. 그 길이도 전자가 126구인 데 비하여 후자는 96구의 단형이다.
<사미인곡>이 임에게 정성을 바치는 것이 주라면 <속미인곡>은 자기의 생활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주이다. 전자가 사치스럽고 과장된 표현이 심한 데 비하여 후자는 소박하고 진실하게 자기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속미인곡>은 <사미인곡>을 지을 때보다도 작자의 생각이 한결 더 원숙하였을 때 이루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 西浦漫筆≫에서 정철의 <관동별곡>과 전후 미인곡은 우리나라의 ‘이소(離騷)’라 할 만하며, 그 중에도 <속미인곡>이 더 고상하다고 하였다.
<관동별곡>이나 <사미인곡>이 한자를 빌려 꾸몄다는 데에서 그 이류를 들고 있다. 그러나 한자를 빌려 꾸민 것 이외에 <속미인곡>의 표현이 그만큼 진솔하고도 간절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속미인곡>은 이렇게 역대에 여러 사람들의 사랑을 입었을 뿐 아니라 한역(漢譯)도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김상숙(金相肅)과 그의 6세손인 정도(鄭棹)가 번역한 것이 있다. 정철의 가사문학사에서 절정을 장식하는 회심작(會心作)인 <속미인곡>은 이러한 한역을 통하여 단 하나 감상의 대상을 넓히게 되었다.
<속미인곡>은 <사미인곡>과 더불어 뒷날 연군(戀君)의 정서를 읊은 여러 가사의 시원(始原)이 되어 그 본보기로 활용되었다. 또한 이에 대한 연구도 많아 한국 가사문학연구에 있어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