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본. 알려진 것으로는 가장 많은 작품을 실은 개인시조집이다. 「풍아(大)」·「풍아(小)」·「시가(詩歌)」 등 3권으로 되어 있다.
「풍아(大)」에는 422수의 시조와 가사체인 「상사별곡(相思別曲)」이 실려 있으며, 「풍아(小)」에는 「풍아(大)」와 중복되는 72수의 시조가 실려 있다. 「시가」에는 157수가 실려 있는데 「풍아(大)」와 중복되지 않는 시조는 15수이다.
그 밖에 제본되지 않은 묶음에서 시조 8수와 이세보의 유배일기인 『신도일록(薪島日錄)』에 12수의 시조가 발견되어 모두 458수의 이세보 작품이 발굴되었다. 이 중 가장 많은 시조를 담고 있는 「풍아(大)」가 원래 의도한 시조집이고, 다른 것들은 그 준비과정에서 파생된 부수적인 것으로 보인다.
시조집 후단에 발문이 있는데, 임술년(壬戌年, 1862)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당하여 지은 노래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풍아(小)」의 표지 뒷면에는 진주민요(晉州民擾)가 일어나 심란하다는 말을 쓴 뒤 한시 한 편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단편적인 기록으로 미루어 이 시조집은 조선왕족이었던 이세보가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을 논하다가 유배를 당하였던 1860년(철종 11)에서 1863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실린 시조들은 그 주제가 다양하여 부정부패를 비판하기도 하고, 애정과 도덕에 대하여 읊기도 하였다. 또한, 시조사상 가장 많은 유배시조와 애정시조가 실려 있으며, 지금까지 조선시조에서는 없었던 월령체(月令體) 시조도 있다.
첫머리에는 그가 26세에 동지사은정사(冬至謝恩正使)가 되어 청나라에 갔을 때 지은 기행시조도 실려 있는데, 주로 음풍농월적(吟風弄月的)인 다른 사대부들의 작품과 대조를 이룬다. 또한, 이세보의 시조는 종장의 마지막 구가 생략된 형식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