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도강(道康). 자는 사화(士和), 호는 해암(懈菴). 아버지는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 김한걸(金漢傑)이며, 어머니는 해남 윤씨(海南尹氏)이다.
그는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었을 때, 또 명종 · 선조가 죽었을 때에 고령에도 불구하고 상복을 입고 상사(喪事)에 임하였다. 당시 그는 비록 관직은 없었지만 『예기』의 내용에 따라 그대로 예를 행하였으므로 당시 전라감사 정철(鄭澈)과 최관(崔瓘)이 조정에 계문(啓聞)하여 벼슬을 내려주기를 청하였다. 그로 인해 경릉참봉(敬陵參奉)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임진 · 정유 왜란 때에는 의병을 모집하고 토지와 노비를 모두 팔아 군량미 500석을 비축하여 의병장 고경명(高敬命)과 조헌(趙憲)을 크게 도와주었다. 그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1567년(명종 22)에 명종의 죽음을 듣고 지은 시조 「서산일락가(西山日落歌)」가 있다.
현존하는 그의 시조작품은 『해암문집(懈菴文集)』 가곡조(歌曲條)에 8수만이 전하고 있지만 오이건(吳以建)이 쓴 「김해암가곡집서(金懈菴歌曲集序)」에는 그가 지은 노래가 100여수 이상이나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저서로는 『해암문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