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3년(영조 49)에 간행된 『해암문집(懈菴文集)』에 실려 전한다.
“三冬(삼동)애 뵈옷닙고 巖穴(암혈)의 눈비마자/굴움 센 벗뉘랄 ○ㅤ젹은 업건마ᄂᆞᆫ/西山(서산)애 ᄒᆡ지다하니 그를 셜워ᄒᆞ노라.”
이 시조는 김응정이 1567년 명종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작품으로, 조식(曺植) 또는 양응정(梁應鼎)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오이건(吳以健)이 쓴 「김해암가곡집서(金懈菴歌曲集序)」는 1690년(숙종 16)에 쓴 것이어서 김천택(金天澤)이 『청구영언』을 찬집한 때보다 38년이 앞선다. 또한 「김해암가곡집서」에 ‘서산일락지곡을 봄으로써 또한 그의 군왕에 대한 충성심을 생각토록 한다.(今西山日落之曲 亦可想其葵衷也)’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이 시조의 작가는 김응정인 것으로 보인다. 『해암문집』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객관적 자료가 충분히 실려 있다.
『청구영언』은 김천택이 찬집한 시조집임은 사실이지만 현전하는 10여종의 『청구영언』이 김천택의 『청구영언』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이희승본(李熙昇本) 『청구영언』 같은 것은 표제만 ‘청구영언’일 뿐 시조집의 내용은 『가곡원류』인 것처럼, ‘청구영언’은 고유명사적인 의미도 있지만, ‘청구(靑丘)’는 우리나라의 별칭이고 ‘영언(永言)’은 노래라는 뜻이므로, 우리 선인들은 우리나라의 시조집을 흔히 ‘청구영언’이라고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현전하는 시조집 가운데 ‘청구영언’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조집이 많게 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또, 고시조집은 필사본으로 된 것이 많으니, 필사자가 어떤 시조집을 보고 필사할 때 원본이 그릇된 것일 경우 그것은 바르게 고쳐지지 않고 후대로 계속해서 전승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시조가 조식의 작품으로 기록되어 전승된 경우도 위의 두 가지 사례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해암문집』과 「김해암가곡집서」가 발굴되지 않았다면 조식의 작품으로 믿을 수도 있으나, 분명한 자료가 나온 이상 조식의 작품이 아님은 자명한 일이며, 『남명집(南冥集)』에도 「서산일락가」를 조식이 지었다는 기록이 없다. 학계에서는 진본(珍本) 『청구영언』을 김천택이 찬집한 시조집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진본 『청구영언』에서는 이 시조의 작자를 양응정으로 기록하였다. 양응정은 공조참판 · 대사성 등의 벼슬을 지낸 사람으로서, 생애와 시조 내용이 결부되지 않으니, 김천택이 처음 『청구영언』을 엮을 때 그 작자를 김응정으로 써야 할 것을 양응정으로 잘못 기록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