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기지(耆之), 호는 나재(懶齋). 채영(蔡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필선 채윤(蔡綸)이고, 아버지는 남양도호부사 채신보(蔡申保)이다. 어머니는 유승순(柳承順)의 딸이다.
1468년(세조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469년(예종 1) 식년문과에 장원하여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예문관수찬이 된 뒤, 홍문관교리·지평·이조정랑 등을 역임하면서 『세조실록』·『예종실록』의 편찬에 관계하였다.
1477년 응교가 되어 임사홍(任士洪)의 비행을 탄핵했으며, 승지를 거쳐 대사헌으로 있을 때 폐비 윤씨(廢妃尹氏: 연산군 생모)를 받들어 휼양할 것을 청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벼슬에서 물러났다.
1485년 비로소 서용되어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하정사(賀正使)·성절사(聖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대사성 등을 거쳐 호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이후 줄곧 외직을 구하여 무오사화를 피하였다. 1499년(연산군 5) 이후 예조참판·형조참판·평안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갑자사화 때는 앞서 정희대비(貞熹大妃)가 언서(諺書)로 적은 폐비 윤씨의 죄상을 사관(史官)에게 넘겨준 것이 죄가 되어 경상도 단성으로 장배(杖配)되었다가 얼마 후 풀려났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여기에 가담,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군되었다.
그 뒤 후배들과 함께 조정에 벼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경상도 함창(咸昌: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에 쾌재정(快哉亭)을 짓고 은거하며 독서와 풍류로 여생을 보냈다. 사람됨이 총명하고 박람강기하여 천하의 서적과 산경(山經)·지지(地誌)·패관소설(稗官小說)에까지 해박하였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시문에는 특히 뛰어나 어려서부터 문예로 이름을 얻을 정도로 당대의 재사였다. 그러나 성격이 경망되고 행동이 거칠고 경솔하여 독실한 유학자는 못 된 데다가, 1511년(중종 6)<설공찬전(薛公贊傳)>이라는 패관소설을 지어 윤회화복을 말하다가 사림의 비난을 받아 불태워지기까지 하였다.
김종직(金宗直)에게 종유(從遊)하고, 특히 성현(成俔)과 교제가 깊었다. 사신으로 북경을 내왕하는 길에 요동명사(遼東名士)이던 소규(邵圭)와도 친교를 맺었으나, 당시 새로이 등장하던 사류(士類)와는 잘 화합하지 못하였다.
1703년(숙종 29) 함창의 사림에 의하여 그의 고장에 임호서원(臨湖書院)이 건립되고 표연말(表沿沫)·홍귀달(洪貴達) 등과 함께 제향되었다. 저서로 『나재집』 2권이 있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시호는 양정(襄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