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최만리는 조선전기 직제학, 강원도관찰사, 집현전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445년(세종 27)에 사망했다. 부정과 타협을 모르는 깨끗한 관원이었고 진퇴가 뚜렷했다. 집현전의 실무책임자인 부제학으로서 불교 배척 상소 등 14차례의 상소를 올렸다. 세종의 한글창제에는 반대하지 않았으나 중국 서적의 한자에 한글로 음을 다는 한자음 개혁에 반대하면서 한글창제의 불필요성, 한글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즉시 세종의 친국을 받고 다음날 석방, 복직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가 여생을 마쳤다.
정의
조선전기 직제학, 강원도관찰사, 집현전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개설
생애
활동사항
그 밖에 일본과의 교역에서 석류황(石硫黃)의 대가를 지나치게 후하게 지불한 것에 대한 책임추궁, 진사시에서 시(詩)의 출제법이 잘못됨을 지적한 것, 그리고 이적(李迹)의 사형결정이 모호하다고 감형을 주장한 것과 사직상소 및 한글반대상소가 있다.
불교배척상소의 대부분은 흥천사(興天寺)의 사리각 중수 및 경찬회(慶讚會)의 혁파를 청하는 것이었고, 첨사원 설치를 반대한 상소는 세종이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에게 섭정시키려 하므로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이었다. 그는 훈민정음이 완성될 때까지 세종의 뜻을 잘 받들어 반대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 세종은 훈민정음을 완성하고 비밀리에 궁중의 의사청(議事廳)에 최항(崔恒) 이하 집현전 소장학사와 동궁 · 진평대군(晋平大君) 등을 참가시켜 원나라의 웅충(熊忠)이 엮은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의 자음을 한글로 달아 일대 자음의 개변운동을 하려 하였다.
세종은 당시 우리나라의 한자음이 체계 없이 사용되는 것이어서 어느 정도 중국체계에 맞도록 새 운서를 편찬하여 당시 한자음을 개혁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에 그는 집현전의 중진학자들과 함께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것이 유명한 한글반대상소문이었다.
이 상소문은 여러 학사의 합작으로 보이며, 조목에 따라서는 한글창제의 불필요성, 한글의 무용론을 주장한 것으로 사대주의적 성향이 짙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진의는 세종의 한자음 개혁에 반대한 것이 된다.
즉, 세종의 최만리에 대한 친국내용을 보면, “내가 만일 이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잡을 것이냐.”라고 한 것을 보면 최만리 등의 상소는 『고금운회거요』의 번역사업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고금운회거요』의 번역사업은 뒤에 『동국정운』의 사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중국에서 『홍무정운(洪武正韻)』이 실패작이었던 것과 같이 우리의 『동국정운』도 그 한자음이 실시될 수 없어 결국 실패로 돌아간 것이라고 한다면, 그의 『고금운회거요』 번역사업의 반대상소 견해는 그러한 의미에서 정당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소문의 내용이 사대주의라고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당시 지배층이 일반적으로 사대주의적 경향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에 대한 평가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
- 『세종대왕의 학문과 사상』(이숭녕, 아세아문화사, 1981)
- 「최만리연구」(이숭녕, 이상백박사화갑기념논문집, 1964)
- 「집현전관의 언관화」(최승희, 『조선초기언관·언론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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