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1763년(영조 39) 8월 일본 통신사 조엄(趙曮), 부사 이인배(李仁培), 종사관 김상익(金相翊), 제술관(製述官) 남옥(南玉) 등으로 구성된 이른바 계미(癸未) 통신사(通信使)의 삼방서기(三房書記)로 수행한 작자가 이듬해 7월 8일 복명할 때까지 11개월 동안 견문한 바를 기록한 것이다.
군관 17명, 역관 12명, 의원 3명을 비롯, 100여명의 행원(行員)과 400명에 달하는 역원들을 합하여 일행 500명이 서울을 떠난 지 두달 만인 10월 6일 부산항에서 승선하여 대마도와 대판성(大阪城)을 거쳐 에도(江戶)에 도착한 것이 다음해 2월 16일이다.
이역만리의 긴 노정에 따라 곳곳에서 일어난 사건, 일본의 풍속, 외교임무의 수행과정 등을 소상히 기록하였고, 강직한 선비의 기개와 비판의식이 넘쳐 있을 뿐 아니라, 기행문의 요체가 잘 갖추어져 있어 홍순학(洪淳學)의 「연행가」와 쌍벽을 이루는 작품이다.
작자 김인겸은 1753년(영조 2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통신사의 서기로 발탁되기까지 향리 공주에 칩거한 강직 청렴한 선비로서, 문장에 특출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행로에서 받은 융숭한 대접과 풍물에 대한 이야기며, 수천수에 달하는 시를 지어 왜인에게 준 문인외교의 편모를 알 수 있다.
특히 “당당한 천승국의 예물예단 가져와서 개돝 같은 취류에 사배(四拜)하기 어떠할꼬.”라는 구절에서는 개돝 같은 왜놈에게 예배하기 싫어 상사(上使)들의 강권도 듣지 않고 국서 봉정식에도 참여하지 않은 작자의 대일감정을 엿볼 수 있다. 왜녀의 음란한 풍속과 일본의 경관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도 특유의 통찰력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작자의 강직 청렴한 정신과 여유와 해학이 넘치는 성격이 반영되어 있으면서 지명 · 인명 · 일시 · 거리와 역사적인 사실에 객관성을 잃지 않은 고전기행문의 대표작이다. 국내의 노정은 주로 삽화와 지방의 특색을 서술하고 감상을 주로 하고 있으나, 일본에 대한 묘사는 객관적인 관찰과 주관적 비판으로 일관하면서도 주체적 정신에 입각하고 있다.
이 작품은 국문학자료로서는 물론, 외교사절단의 규모와 일본의 풍속 및 외교의 방법 등, 한일외교사의 측면에서도 귀중한 자료이다. 이 작품은 가사체로 된 기행문이라는 특성 때문에 서정적 가사라기보다 기행수필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