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행가 ()

연행록
연행록
고전시가
작품
1866년(고종 3) 가례주청사(嘉禮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온 홍순학(洪淳學)이 지은 장편의 기행가사(紀行歌辭).
이칭
이칭
병자연행가(丙子燕行歌), 북원록(北轅錄)
정의
1866년(고종 3) 가례주청사(嘉禮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온 홍순학(洪淳學)이 지은 장편의 기행가사(紀行歌辭).
개설

1866년 3월에 왕비 책봉을 청나라에 주청하기 위하여 우의정 유후조(柳厚祚)를 상사(上使), 서당보(徐堂輔)를 부사로 한 사행(使行:사절단)의 일원이 된 홍순학(洪淳學)이 4월 9일 서울을 출발하여 북경에 갔다가 그 해 8월 23일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총 133일 동안의 견문을 기록한 것이다. 모두 3,800여 구에 달한다.

서지적 사항

낙선재본(樂善齋本)과 국회도서관본이 전하고 있으며, 이 두 대본을 대교(對校)하여 수정한 『연행가』를 신구문화사(新丘文化社)에서 간행하였다.

내용

작자 홍순학은 1857년(철종 8)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이후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를 지낸 25세의 젊은 선비로 사행에 오를 때 소년공명(少年功名)의 자부심과 기개가 있었다.

서울을 떠나 고양 · 파주 · 임진강(臨津江) · 장단(長湍) · 송도 · 평산(平山) · 곡산(谷山) · 황주 · 평양 · 가산(嘉山) · 정주(定州)를 거쳐 의주까지 국내에서만도 거의 한 달이 걸린 여정이었다.

압록강을 건너면서 비로소 “허박하고 약한 기질 만리행역 걱정일쎄.”라 하며 이측(離側)한 외로움과 가국(家國) 생각에 무거운 나그네의 심회를 말하고 있다.

국내에서 융숭하였던 지공(支供) · 지대(支待)와는 달리, 무인지경 만주 벌판에서의 군막생활(軍幕生活)의 어려움과 봉황성(鳳凰城)에서 만난 호인남녀(胡人男女)의 기괴한 옷차림과 생활, 낯선 이국의 풍물 등을 소상히 관찰하여 그의 특유의 익살로 표현하였다.

청석령(靑石嶺)을 넘으며 효종 임금이 심양에 끌려가[入瀋] 받은 모욕[受辱]을 통분하였던 이야기며, 요동(遼東) 700리에서 뽐낸 사내의 호기가 번뜩인다. 북경의 문루(門樓) · 사우(寺宇) · 고적을 소견하고, 시전(市廛)을 두루 살펴 환희(幻戱) · 요술(妖術)을 참관하고, 인사를 방문하여 인정을 교환하였던 일 등 당시의 정황을 밝혀주고 있다.

“눈깔은 움쑥하고 콧마루는 우뚝하며 머리털은 빨간 것이 곱슬곱슬 양모 같고 키꼴은 팔척장신 의복도 괴이하다. 쓴 것은 무엇인지 우뚝한 전립 같고 입은 것은 어찌하여 두 다리가 팽팽하냐, 계집년들 볼짝시면 더구나 흉괴하다. 퉁퉁하고 커다란 년 살빛은 푸르스름…… 새끼놈들 볼 만하다. 사오륙세 먹은 것이 다팔다팔 빨간 머리 샛노란 둥근 눈깔 원숭이 새끼들과 천연히도 흡사하다.”라고 하였다.

의의와 평가

서울에서 북경까지 긴 노정에 따라 고적을 더듬고, 풍속을 살피고, 인정에 접하였던 바를 소상히 기록한 여행기로 김인겸(金仁謙)의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와 쌍벽을 이루는 작품이다.

북경 길가에서 만난 초견(初見) 서양인을 익살로 표현한 대목에서 조선 선비의 오기(傲氣)를 볼 수 있다. 7월 18일 회환(回還), 복명하고 집에 돌아오기까지 반년에 걸친 연행중 보고 느낀 것을 담아놓은 작품이다. 혹자는 이 작품을 가사로 보지 않고, 광의의 수필문학에 포함시키는 이도 있다.

참고문헌

『철종실록(哲宗實錄)』
『고종실록(高宗實錄)』
『연행가(燕行歌)』(이석래교주, 신구문화사, 1976)
『국문학통론』(장덕순, 신구문화사,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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