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수의 연시조로 『고산유고(孤山遺稿)』에 전한다. 당시의 권신이던 이이첨(李爾瞻) 등의 죄를 규탄하는 병진소(丙辰疏)를 올렸다가 도리어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유배되어 30세 때에 지은 작품이다.
제1수는 작자에게 돌아오는 대가가 슬프거나 즐겁거나, 남들의 말이 옳다고 하거나 그르다고 하거나간에 자신의 신념에 맞도록 자신의 일을 갈고 닦을 뿐이지 그밖의 결과 여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신념에 불타는 내용이다.
제2수는 병진소의 결과로 유배오게 되었으니 임금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자신의 행위를 망녕되다고 한다. 자신에게 피해가 돌아오는 일을 하였으니 자기 마음을 어리석다고 일단 수긍한다. 그러나 그것은 임금을 위한 일이며, 누가 어떤 말을 하든 임금이 현명한 판단을 내려달라고 하는 내용이다.
제3수는 작자가 귀양 와 있는 추성(楸城) 진호루(鎭胡樓) 밖에 흐르는 시냇물을 제재로 한 것이다. 이 시냇물은 울면서 흐르며, 게다가 밤낮으로 그치지도 않는다. 이처럼 끝없이 체읍(涕泣: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욺.)하는 시냇물이야말로 임(임금)을 향하여 쉬지 않고 울며 지내는 작자의 마음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다.
제4수에서는 길고 긴 산, 멀리멀리 흘러가는 물, 울고 가는 외기러기에 작자의 모습을 투영함으로써 어버이를 그리는 정을 살뜰히 드러내고 있다. 제5수는 효를 충과 동일시하면서, 어버이를 그리는 효는 임금을 섬기는 충이라는 대의 앞에서는 부정될 수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군신관계는 부자관계보다 선행한다는 유학도로서의 전형적인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이들 작품에는 한결같이 젊은 시절의 작자의 모습과 패기가 선명히 나타나 있으며, 임금을 향한 충절과 어버이를 생각하는 효성이 유학도의 의연한 감성으로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