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3수. 『고산유고(孤山遺稿)』권6 하(下) 별집에 실려 있다. 「어부사시사」를 지은 이듬해 성균관 사예(司藝)로 특소(特召)되어 승지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주위 신하들의 심한 시기와 노환으로 인하여 물러나 양주(楊州) 고산(孤山)에 머물러 있을 때 지은 작품이다.
「몽천요」에는 발(跋)과 함께 한역가가 실려 있다. 발에 보면, “무릇 내가 탄식하고 영탄하는 나머지 나도 모르게 그것이 소리로 나와 길게 말하니 동학들이 희희거리며 놀리거나 꾸짖음이 어찌 없으리요마는, 내가 진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은 이른바 ‘내 옛사람을 생각하여 진실로 내 마음을 알았도다’라는 것이다.”라고 하여 작품을 짓게 된 심정과 자신의 처한 환경을 적고 있다.
제1수에서는 꿈엔지 생시엔지 올라간 백옥경에서 옥황은 자신을 반겨주나 뭇 신선은 꺼린다고 하며, 그렇다면 다 그만두고 다시 오호연월(五湖烟月: 고향의 경치가 빼어남을 말한 것)로 돌아가겠노라고 하였다. 뭇 신선의 꺼림 속에 있느니 차라리 강호 속에 묻혀 시비를 잊고 지내는 것이 훨씬 낫겠다는 것이다.
제2수는 제1수의 부연 · 확장이며 은거지로 물러난 현재의 처지를 더욱 안타까운 심정으로 노래하였다. 제1수의 옥황의 반김이 웃음으로, 군선의 꺼림이 꾸짖음으로 바뀌어 태도의 강화가 드러난다. 끝 구에서는 백억만 창생에 대한 근심을 말하여 결국 옥황은 임금이고, 군선은 조정의 신하들임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었다.
제3수에는 군선은 보이지 않고 옥황만 나타난다. 역시 우의적 표현으로 현실에 커다란 환란이 닥치거나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였을 때 어떻게 하겠느냐고 임금에게 물어보려 하였으나 채 묻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17년 만에 “머도록 더옥 됴타”던 인간 세상에 돌아왔으나 여전히 시기와 헐뜯음으로 그를 맞이하는 세상에 대한 허탈한 마음을 담아 노래한 것이다. 은거 끝에 현실에 돌아와서 받는 실망과 좌절감을 우의적인 언어로 잘 표현하였다.
지은이가 겪는 강호와 현실 사이에서의 이러한 갈등은 「어부사시사」에서의 강호가도(江湖歌道)의 표방과 함께 조선조 사대부들의 처사접물(處事接物: 일을 처리하고 사람을 응대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 유익한 시사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