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가 75세 때 당시 영남안절사로 와 있던 이근원(李謹元)의 덕치(德治)를 찬양하여 읊은 것으로 『노계집(蘆溪集)』에 실려 있다. 형식은 4음보 1행 기준으로 모두 57행이다.
이 작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영남지방에 살아남은 백성들에게는 대대로 이어 내려오는 세업(世業)이 있을 리 없고, 폐허가 된 전쟁터에 초가집 두어 칸을 지어 농사를 지으려 하나 거칠고 묵은 밭이라 갈기가 어려우며, 가뜩이나 할 일이 많은데 부역조차 과중한 당시의 형편을 말하였다.
그러나 백일(白日) 같은 성명(聖明: 임금의 밝은 지혜)은 이근원을 순찰사로 보내니 영남 백성이 갱생(更生)할 때라고 하였다. 이어서 이근원의 덕을 후직(后稷)·설(契)·고요(皐陶) 등의 명신에 비겨, 백성 다스리는 도리를 올바로 알아, 70주(州)를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은혜를 베푸니 백성들은 몹시 기뻐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집집마다 그의 덕화(德化)가 고루 미쳐 온 백성이 안심하고 일하도록 해주었으며, 활과 화살 등 무기도 갖추게 하고, 인륜 밝히는 유교를 중요한 임무로 힘쓰니 영남지방의 시운(時運)이 아닌가 하고 그의 덕을 찬미하였다.
이와 같이 다스리니 각 고을 수령들이 그의 본을 받아 백성 사랑하는 마음이 어디고 모두 같으니 전란 후의 폐허가 무릉도원이 되었다고 읊었다. 또한, 노랫소리가 이어지니 요순시절을 다시 본 듯하다고 하였다. 송사도 없어지고 감옥이 비게 되니, 그것은 민심(民心)이 감화되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관청과 촌락이 모두 무사하고, 남녀는 길을 갈 때 서로 길을 달리하고, 밭가는 사람들은 서로 밭둑을 양보하니 이 땅이 어디인지 주(周)나라에 들어온 듯하다고 노래하였다.
끝으로, 이근원으로부터 소공(召公)과 같은 덕화를 느껴, 한 해 더 유임할 것을 빌고 싶다고 하였다.
또한 그의 은덕을 잊지 않기 위하여 비단에 그 화상(畫像)을 수없이 그려, 집집마다 벽 위에 붙여 두고 숭앙하자고 하였다. 이 작품은 한문투가 작자의 다른 작품에서보다 더 심한 편이나 능숙한 어휘구사로 이근원의 선정을 무리없이 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