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제(趙潤濟)가 처음으로 개념을 정립하였다. 조선시대의 시가 작품, 예컨대 <강호사시가>·<상춘곡>·<어부사시사>·<창랑곡 滄浪曲> 등으로, 제목 자체부터 그 내용이 자연 예찬임을 짐작하게 한다.
자연 예찬은 조선시대 시가 내용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문학 현상을 조윤제는 문학 사조로 파악해 ‘강호가도’라 부르고, 그 내용을 ‘자연미의 발견’이라 규정, 강호가도의 형성 원인을 조선시대 사대부층의 정치상과 생활상에서 파악하였다.
연산군 때부터 줄곧 일어난 당쟁에 휩쓸려 당시 사대부들은 자칫 잘못하면 일신을 보전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명철보신(明哲保身)을 꾀하는 사람은 아예 벼슬길에 나가려 하지 않았고, 기왕에 나간 이는 세상이 어지럽게 되면 벼슬자리에서 물러나려 했다. 이리하여 뜻있는 사람 혹은 풍파에 놀란 사람은 벼슬을 단념하고 당쟁에서 벗어나 산과 들에 파묻혔으니, 장만(張晩)의 다음 시조가 그러한 사정을 말해 준다.
“풍파(風波)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구절양장(九折羊腸)이 물도곤 어려웨라/이후란 배도 말도 말고 밭 갈기만 하리라(甁窩歌曲集 216).” 이들은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산속과 물가에 뜻을 붙여 밤낮으로 자연에 마음을 팔고, 때로는 맑은 시냇가에서 짐짓 어부인 체하고 하루를 보내며, 벗을 만나면 술병을 열어 놓고 시를 읊어 밤이 깊어 가는 것도 모르면서 태평시대의 한가로운 백성들과 같은 생활을 하였다.
한편, 나이 들어 벼슬을 마친 사대부들은 조용히 고향마을에 물러앉아 바쁘던 국가사회의 일도 잊어버리고 산과 물에 즐거움을 붙여 늙어 가고자 하기도 하였다. 송순(宋純)의 “늙었다 물러나자 마음과 의논하니/이 님 바리고 어드러로 가잔 말고/마음아 너란 있거라 몸만 몬저 가리라(甁窩歌曲集 620).”의 시조는 이같은 ‘치사객(致仕客)의 한적(閑適)’을 보여 주는 예이다.
연산군시대 이후에 자연은 이런 저런 경우로 인생과 더불어 이해되고, 동시에 문학적으로 그 참다운 아름다움이 점점 발견되어 갔다. 자연이 충분히 이해되고 그 아름다움이 남김없이 발견된 것, 즉 강호가도의 구체적 성립은 이현보(李賢輔)와 송순에 이르러서부터다.
이처럼 강호가도가 성립된 것은 정치적인 문제에서 비롯했으나, 여기에 토지경제적인 뒷받침과 조선시대 사림(士林)의 도학적 문학관의 작용을 간과할 수 없다. 세조 때 토지의 사유화가 이루어져서, 양반들은 이 사유지에 기반을 둔 생활 근거가 마련되어 있었으므로 벼슬에서 물러나 강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사대부층 가운데 도학자들은 “도의를 기뻐하고 심성을 기르는[悅道義頤心性]”(退溪全書陶山雜詠記) 즐거움은 자연을 매개로 한다고 보았으므로 강호를 동경했고, 강호 문학이 자연 활발히 전개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시가 문학에 나타난 이와 같은 특성을 ‘강호가도’로 정립시킨 것은 의의가 깊다. 먼저, 작품에 따라 개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자연미’라는 보편적인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작품에 드러난 자연미를 통해 당대인들의 미의식을 추출해 낼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국문학의 특질을 찾아내는 데 긴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강호가도에 관한 연구는 국문학 분야에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다루어야 할 중요한 과제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