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수의 연시조. 작자는 이 작품을 전육곡(前六曲)·후육곡(後六曲)으로 나누고, 전육곡을 ‘언지(言志)’, 후육곡을 ‘언학(言學)’이라 이름 붙였다. 『언지』는 천석고황(泉石膏肓: 산수를 사랑하는 것이 마치 불치병처럼 지나침)의 강호은거(江湖隱居)를 읊었고, 『언학』은 학문과 수양을 통한 성정(性情)의 순정(醇正)을 읊었다. 도산서원(陶山書院)에 목판본이 있다.
작자는 이 작품을 짓게 된 동기를 「도산십이곡발(陶山十二曲跋)」에서 “한림별곡류(翰林別曲類)는 긍호방탕(矜豪放蕩)하고 설만희압(褻慢戱狎)하여 군자의 숭상할 바가 아니다.”, “이별육가(李鼈六歌)는 완세불공(玩世不恭)의 뜻이 있고 온유돈후(溫柔敦厚)의 실(實)이 적다.”, “국문시가는 한시(漢詩)와는 달라서 노래할 수 있어서 흥이 난다.”라고 말하였다. 첫째와 둘째는 기존의 시가에 대한 불만이고, 셋째는 국문시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한림별곡」·「관동별곡」·「죽계별곡(竹溪別曲)」의 한림별곡류는 고려 사대부의 풍류를 읊었는데, 관능적이고 향락적이다. 작자는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배척하고, 그 대신 새로운 풍류를 제시하였다. 즉 산수유상(山水遊賞)을 통해 올바른 성정을 수양해 가는 일이다.
이별육가는 ‘은(隱)’을 강력히 주장했는데, 그것은 ‘결신멸세(潔身蔑世)’의 오만스러운 내용이다. 작자는 이것을 배척하고 조선 사대부에 맞는 ‘은’을 제시했으니, 바로 “연하(煙霞)로 지블 삼고 풍월(風月)로 버들 사마/태평성대(太平聖代)에 병으로 늘거가뇌/이 듕에 ᄇᆞᄅᆞᄂᆞᆫ 이른 허므리나 업고쟈”의 천석고황이다. ‘은’에는 ‘결신’이 으레 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겸선(謙善)’에 그쳐야지 ‘멸세’에 흘러서는 안 된다. 작자는 특히 멸세의 오만을 경계한 것이다.
작자는 한시와 시조의 차이를 ‘영(詠)’과 ‘가(歌)’로서 파악하고, 가창이 낳는 흥에다가 시조의 존재 이유를 설정하였다. 이것은 문학관으로서의 하나의 자각이다. 한시에서는 충족할 수 없는 흥을 시조에서 찾고, 그 흥을 매개로 자기를 창조하는 그런 자각이다. 그 자각이 이 작품을 낳게 한 것이다.
「도산십이곡」은 후세 사림파(士林派) 시가의 중심적 지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