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산(梁山). 자는 여빈(汝彬), 호는 송담(松潭). 경상남도 양산 출생.
부여백씨(扶餘白氏)지만, 그가 임진왜란 때 왜군의 포로가 되고, 또한 병화(兵火)로 그의 보첩(譜牒)을 잃었기 때문에 가계(家系)가 분명하지 못하며, 언제 양산에 옮겨 정착하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가 일본에서 풀려나 돌아와 증조대(曾祖代)로부터 중시조(中始祖)를 잡아 새로 가첩(家牒)을 이룬 것으로 추정된다.
10대 초반에 일찍 부모를 여의고 성장했으나 학행(學行)에 힘썼고, 어렸을 때부터 지기(志氣)가 남들에 비해 뛰어났다. 그러나 그의 68년에 걸친 생애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국내 정세의 불안으로 평탄하지 못하였다.
19세 되던 해인 1592년(선조 23)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군에 잡혀 일본으로 끌려가 거기서 9년 동안 포로 생활을 했지만, 고국에 대한 지절(志節)을 굽히지 않아 오히려 왜인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포로 생활의 고독한 심사를 시편이나 가사로 짓다가 27세 되던 해 석방되어 환국하였다. 당시 세인들은 그의 지조를 기려 그가 머물던 가자방리를 가리켜 백의사리(白義士里)라고도 했다.
그 뒤 약 14년 동안은 외부와 단절하고 아무런 교유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40세 되던 해인 1613년(광해군 5) 조정에서는 광해군의 폐모 사건으로 의론이 분분할 때 그에 분연히 반대하는 등,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여러 번 상소해 맹렬히 비판하였다. 이로 인해 점차 명사들과 교유의 길이 트이고 잠시 벼슬길에 나아가기도 하였다.
인조반정 후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을 지냈다. 그러나 1628년(인조 6) 상소를 한 것이 각하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 후, 후학의 교육에 힘썼으며 둔세절교(遁世絶交 : 세상을 등지고 교유를 끊음)하고 여생을 보내다가 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현종이 호조참의에 추증하고, 옛 집에 충렬사(忠烈祠)를 지었으며, 숙종이 편액을 하사하였다.
그의 작품으로는 왜군에 포로가 되었을 때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지은 5편의 한시와 가사를 남기고 있다. 가사 4수는 「도대마도가(到對馬島歌)」·「재일본장가(在日本長歌)」·「단가(短歌)」·「화경도인안인수가(和京都人安仁壽歌)」로서 우국충정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박인로(朴仁老)의 가사들과 함께 임진왜란기의 가사 문학 공백기의 맥을 이어주었다는 국문학사적 의의와, 적지에서 불굴의 우국충정을 노래했다는 문학적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