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에 제37호 발행으로 폐간되었다. 국어학사상 국어학 연구의 근대화 과정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문헌이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1930년대 조선어학회(현 한글학회)의 기관지 ≪한글≫과 함께 1930년대 국학진흥운동(國學振興運動)의 일환으로 전개된 시대적 부응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이 ≪정음≫지는 8·15 이후 학회가 재건되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학리적(學理的)인 면에서도 ≪한글≫지와 대립되기 때문에 이단시하는 경향이 있어 학계에서 거의 소외되어 왔으나 다시 그 가치를 재인식하려는 동향이 있다.
이 잡지 발간의 의의는 조선어학연구회의 발족과 박승빈의 문법학설 그리고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나타난 주시경학설과의 대립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정음≫지는 조선어학연구회의 중심 인물인 박승빈의 문법이론을 근거로 주시경학설에 의거한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맞서 1930년대 전반을 장식한 문법논쟁(文法論爭)의 기수였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1933년 10월 29일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이 정식으로 확정 발표되자 조선어학연구회 측에서는 박승빈학설의 이론적 주장과 그 반대 운동을 조직화하기 위하여 이듬해 1934년 2월 15일 자로 기관지 ≪정음≫을 발행하였다.
한편 동년 6월 22일에는 조선문기사정리기성회(朝鮮文記寫整理期成會)를 따로 조직하고 같은 해 7월에는 「한글맞춤법통일안반대성명서」를 발표하여 정면으로 조선어학회와 맞서 문법논쟁에 들어갔다.
이와 같은 사실은 기관지 ≪정음≫ 창간호에 실린 「조선어학연구회 취지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취지서에서는 주시경학파의 집결로 조직된 조선어학회와 대립하여 박승빈학설을 터전으로 표기법을 통일하려는 새로운 문자운동의 추진체임을 자처하며 설립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조선어학연구회는 기관지 ≪정음≫을 통하여 그 반대이론을 전개하면서 강습회 강연회 또는 토론회를 통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려고 노력하였다.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둘러싼 1930년대의 문법논쟁은 표면상 이를 제정한 조선어학회와 이에 정면으로 반대의 기치를 들고 나온 조선어학연구회와의 논쟁으로 볼 수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그 논거를 개진한 양측의 기관지 ≪한글≫과 ≪정음≫의 치열한 논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일반 사회인사들의 찬·반의 의견 개진이 없는 바도 아니었으나 이것도 결국은 이 양측의 이론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이 양측의 근본적인 이론적 차이점을 들면 ≪한글≫을 중심으로 전개하는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대다수가 주시경의 문법체계를 이끄는 학자들로 형태론적 근거에서 표기법의 원리를 삼고 있는 데 반하여 ≪정음≫을 중심으로 전개한 반대편의 조선어학연구회 회원들은 박승빈문법에 의거한 전통적 표기법인 음운론적 근거에서 표기법의 원리를 삼고 있었다는 데 있다.
따라서 전자는 새로운 형태론적 문법이론에서 출발한 만큼 종래의 전통적 표기법을 전적으로 변혁하는 것이고, 후자는 종래의 전통적 표기법을 가능한 한 살려야 한다는 주장이므로 서로 타협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었다.
조선어학연구회는 조선어학회에 밀려 비록 본래의 뜻은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기관지 ≪정음≫을 꾸준히 발간하여 37호로 폐간하기까지 약 10년 동안이나 국어연구와 그 보급에 이바지하였고, 출간되지는 않았지만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주시경, 권덕규, 이규영 등이 편찬하기 시작한 ≪조선어사전≫의 원고를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를 거쳐 인수하여 계속한 점 등 민족문화의 수성에 공헌한 점은 조선어학회나 ≪한글≫지와 더불어 민족항쟁사에서 커다란 의의를 갖고 있다. →조선어학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