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공찬전」은 1511년(중종 6) 무렵 채수(蔡壽)가 지은 고전 소설이다. 본래 한문으로 쓰였고 한글로 번역되어 크게 유행했다. 현재 한문본은 전하지 않으며, 국문본은 설공찬의 영혼이 사촌 형제 설공침의 몸에 빙의하여, 여러 가지 사건을 일으키다가 저승에 관해 이야기하는 부분까지만 전하고 있다. 당시 이 작품이 담고 있는 불교 윤회, 지옥, 무속적 내용인 귀신 빙의 등이 크게 문제가 되었다. 애초에 한글로 창작되지는 않았으나, 한글로 표기된 최초 소설이라는 점에서 소설사적 의의가 크다.
『중종실록』에서는 「설공찬전(薛公瓚傳)」,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에서는 「설공찬환혼전(薛公瓚還魂傳)」으로 표기하였고, 국문본에서는 「설공찬이」로 표기하고 있다.
애초에 한문으로 쓰인 뒤 한글로 번역되었다. 창작 시기는 채수가 1511년 9월에 탄핵받은 것을 감안하면 1508~1511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중종실록』 1511년(중종 6) 9월 2일 기사에 「설공찬전」이 한글로 번역되어 퍼지고 있다며 이 책을 거두어 들여야 한다는 조정의 논의가 나타난다.
한문 원본은 그 내용이 불교의 윤회화복설을 담고 있어 백성을 미혹한다 하여 왕명으로 모조리 불태워진 1511년 9월 2일 이래 전하지 않는다. 한글로 번역된 국문 필사본이 이문건(李文楗)의 『묵재일기(默齋日記)』 제3책의 이면에 「왕시전」 · 「왕시봉전」 · 「비군전」 · 「주생전」 국문본 등 다른 고전소설과 함께 은밀히 적혀 있다가 1997년에 극적으로 발견되었다. 국문본도 후반부가 낙질된 채 13쪽까지만 남아 있다.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순창에 살던 설충란의 슬하에 남매가 있었는데, 딸은 혼인하자마자 바로 죽고, 아들 공찬도 장가들기 전에 병들어 죽는다. 설공찬 누나 설씨의 혼령은 설공찬의 삼촌 설충수의 아들 공침에게 들어가 병들게 만든다. 설충수가 주술사 김석산을 부르자, 혼령은 공찬을 데려오겠다며 물러간다. 곧, 설공찬의 혼령이 사촌 동생 공침에게 들어가 왕래하기 시작한다.
공침이 야위어 가자 설충수는 김석산을 불러 아들 공침에게 들어온 공찬의 영혼을 내쫓으려고 한다. 그러자 설공찬이 공침을 극도로 괴롭게 한다. 설충수가 다시는 김석산을 부르지 않겠다고 빌자 공찬은 공침의 모습을 회복시켜 준다. 이후 설공찬은 사촌 동생과 윤자신을 부르고, 이들이 저승에 관해 묻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저승의 위치는 바닷가이고 이름은 단월국, 임금의 이름은 비사문천왕이다. 저승에서는 심판할 때 책을 살펴 하는데, 공찬은 저승에 먼저 와 있던 증조부 설위의 덕으로 풀려났다. 이승에서 선하게 산 사람은 저승에서도 잘 지내나, 악한 사람은 고생을 하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 이승에서 왕이었더라도 반역해서 집권하였으면 지옥에 떨어지며, 간언하다 죽은 충신은 저승에서 높은 벼슬을 하고, 여성도 글만 할 줄 알면 관직을 맡을 수 있다.
하루는 성화 황제가 사람을 시켜 자기가 총애하는 신하의 저승행을 1년만 연기해 달라고 염라왕에게 요청하는데, 염라왕은 고유 권한의 침해라고 화를 내며 허락하지 않는다. 당황한 성화 황제가 친히 염라국을 방문하자, 염라왕은 그 신하를 잡아오게 해 손을 삶으라고 한다.
이 작품은 조정에서 소각을 명할 만큼 문제작이었다. 이 작품으로 말미암은 필화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중종반정 이후 국가적 차원에서 유교적 원칙을 엄격히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이에 따라 「설공찬전」의 불교적 내용은 세상을 미혹시키는 요서로 규정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함께 공신과 비공신의 대립 역시 필화의 한 원인이 되었다. 당시 대간은 무분별한 공신 책봉을 계속 문제 삼았는데, 채수 역시 정국공신 4등 끝자리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대간이 볼 때 채수는 무분별한 공신 책봉의 수혜자이며,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를 체화하지 못한 문인이었던 것이다. 소설 내용과 더불어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가 맞물려 필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 작품은 귀신 또는 저승을 주요 소재로 활용하고 있다. 채수는 어렸을 때 귀신이 출현하는 현장을 목격한 경험이 있는데, 이것이 작품 창작에 강력한 동인으로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남염부주지」 · 「박생」 같은 여타 저승 경험담 계열의 전기(傳奇) 소설이나 설화에서와는 달리 주인공이 살아나지도, 그 일을 꿈속의 일로 돌리지도 않는다. 다만, 주인공의 영혼이 잠시 지상에 나와 자신의 경험을 진술한다는 점에서 매우 개성적인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순창이라는 실제 지역을 배경 공간으로 삼아 이 곳을 관향으로 하는 설씨 집안의 실화라 표방하고, 등장인물도 실존 인물과 허구적 인물을 교묘히 배합해 설정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친숙한 원귀 관념 및 무속에서의 공수 현상 등을 활용함으로써 대중의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과 채수의 행적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이 어떠한 주제를 지향하고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강직한 언관의 길을 걷던 채수는 중종반정 직후 관직을 버리고 처가인 함창(咸昌)에 은거하였는데, 여기에서 쾌재정을 짓고 소일하는 동안 평소 발언하고 싶었던 바를, 이 소설을 빌어 피력한 것으로 보인다.
작품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주인공 공찬의 혼령이 전하는 저승 소식인데,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반역으로 정권을 잡은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 대목이다. 이는 연산군을 축출하고 집권한 중종 정권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폭군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보필하여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하는 것이 신하의 바른 도리라는 평소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다.
아울러 여성이라도 글만 할 줄 알면 얼마든지 관직을 받아 잘 지내더라는 대목도 주목되는데, 이는 여성을 차별하는 조선의 사회 체제를 꼬집은 것이라 하겠다.
한마디로 말해, 이 작품은 유교 이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혼과 사후 세계의 문제를 끌어와 당대의 정치와 사회 및 유교 이념의 한계를 비판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이 지니는 국문학사적 가치는 지대하다. 이 작품은 『금오신화』를 이어 두 번째로 나온 소설로서, 『금오신화』(1465∼1470)와 『 『기재기이(企齋記異)』(1553) 사이의 공백을 메꾸어 주는 작품이다. 특히, 그 국문본은 한글로 표기된 최초의 국문 번역 소설로서, 이후 본격적인 창작 국문 소설이 출현하게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
그 동안 학계에서는 최초의 국문 소설로 알려진 「홍길동전」이 장편인 데다 완벽한 구조를 지니고 있어, 필시 그 이전에 어떤 형태로든 국문 표기 소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왔다. 그러나 그 중간 작품으로 제시된 「안락국태자전」 · 「왕랑반혼전」 등이 모두 소설이 아닌 불경의 번역이라 안타까워했는데, 「설공찬전」의 국문본이 발견됨으로써 이 가설이 물증으로 증명되었다.
이 작품은 조선 최초의 금서로 규정되어 탄압받았을 만큼, 각지 각층의 독자에게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인기를 끌어 조정에서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 소설로는 유일하게 『조선왕조실록』에도 올랐으니, 소설의 대중화를 이룬 첫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국문으로 번역되어 유통된 것은 이러한 인기와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이며, 이 작품의 국문본은 우리 소설 연구에서 넓은 의미로 번역체 국문 소설의 가치를 적극 평가할 필요성을 강하게 일깨워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