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재일기(默齋日記)』 제3책 이면에 「설공찬전(薛公瓚傳)」, 「왕시봉전」, 「비군전」, 「주생전(周生傳)」과 함께 필사되어 있다. 이들 작품들을 고려할 때, 「왕시전」은 고전소설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총 12쪽 정도의 짧은 분량 속에 여자 주인공 왕시와 남자 주인공 김유령의 혼인에 따른 갈등과 고난, 그리고 극복 과정을 그리고 있다.
부모를 여의고 늙은 여종 무빙과 살던 왕시는 19세 때 김유령과 혼인을 한다. 하지만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왕시의 어짊을 안 나라에서 왕시를 빼앗아 간다(나라의 오래된 신하가 빼앗아 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김유령이 자기가 죽거든 지나다니는 왕시라도 볼 수 있게 대궐 문 보이는 곳에 묻으라고 한 것을 보면 왕시는 대궐에서 생활한 사람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다). 왕시를 그리워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김유령은 어느 날 ‘돈 1만 관을 가지고 화산도사를 찾아가라’는 꿈을 꾸고는 즉시 출발한다. 왕시와 함께 살고 싶다는 김유령의 소원을 들은 화산도사는 악행을 저지르지 말고 짐승이라도 구해 주라는 요구를 한다. 김유령이 덩굴에 걸린 뱀과 옥에 갇힌 도둑을 구제해 주고 오자, 화산도사는 엉뚱하게 바람직하지 못한 것들을 살려 주는 실수를 저질렀다며 다시 나가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번 일로 신선계에서 잘못한 바람에 인간 세계에 살게 된 죄를 용서해 주려고 하였다는 말도 한다. 김유령이 근신하며 지내다가 다시 입산하자, 화산도사가 돈을 던져 신인을 부른 후, 김유령과 왕시를 죽여서 데려오게 한다. 그 후 화산도사는 김유령을 되살리고, 석 달 안에 왕시의 장사를 치르라고 한다. 김유령이 20일 만에 왕시의 장사를 지냈으나, 살아오지 않자 다시 화산도사를 찾아간다. 화산도사는 부적으로 귀신을 부른 후, 신인에게 귀신들을 데리고 가 왕시의 무덤을 파서 시신을 화산 밑에 두고 오라고 명한다. 화산도사와 작별하고 오던 김유령은 화산에서 왕시를 만난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가서 살았는데, 김유령은 높은 벼슬에 오른다. 모두 80살까지 살다가 왕시가 먼저 죽고, 이어 김유령도 죽었으나 본래 선인인 관계로 자취가 남지 않았다.
김유령이 왕시를 빼앗기는 데에는 ‘관탈민녀(官奪民女)’ 모티프의 모습이 담겨 있고, 또한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재생(再生)’ 모티프도 드러난다. 신선계의 인물이 어떤 잘못을 저질러 인간 세계로 내쳐져 김유령으로 살다가 죽었는데 자취가 없다는 말은 다시 신선으로 돌아갔다는 의미이다. 서술이 소략하기는 하지만 이는 바로 후대의 우리 고전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적강(謫降)’ 모티프이다. 「왕시전」이 초기작으로 분량이 적음에도 이와 같이 고전소설의 다양한 모티프를 담고 있다는 점은 의미가 크다. 아울러 도교적 분위기가 강하게 드러나는 것도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