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인천강지곡 권상』은 조선전기 제4대 왕 세종이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모아 한글로 편찬한 시가집이다. 『석보상절』과 함께 합편되어 『월인석보』로 간행되었다. 수양대군이 『석보상절』을 지어 올리자 이를 본 세종이 책의 내용에 맞추어 부처의 일생을 찬탄하는 영웅서사시로 읊은 것을 책으로 펴낸 것이다. 권상에 실린 노래가 모두 194곡이므로 3권을 모두 합하면 580여 곡의 노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글을 위주로 하고 한자를 협주로 표기한 최초의 한글활자본이자 「용비어천가」 다음으로 오래된 자료로서 장편서사시의 선구적 작품이기도 하다.
이 책은 『석보상절(釋譜詳節)』과 함께 합편되어 『월인석보(月印釋譜)』로 간행되었다. 『월인석보』에 전하는 「석보상절서」에 의하면,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석보상절』을 지어 올리자 이를 본 세종이 『석보상절』의 내용에 맞추어 부처의 공덕을 칭송하여 읊은 것이라 한다. 원간본과 대조해보면, 이때 『석보상절』보다는 심하지 않으나, 한자(漢字)와 독음의 위치 변경, 한자음 종성(終聲)에서의 ‘ㅇ’ 사용, 협주(夾註)의 추가, 가사(歌詞)의 수정 등 부분적인 변개와 곡차(曲次)의 변동이 있었다. 또한 이 책이 단독으로 중간된 일은 없었다.
이 책의 간행시기는 『석보상절』이 이루어진 1447년(세종 29)에서 그 다음해인 1448년 사이에 완성하여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권상에 실린 노래가 모두 194곡이므로 전체로는 모두 580여 곡의 노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월인석보』에 실린 노래까지 합하면 모두 약 440곡이 알려져 있다. 1961년 통문관(通文館)에서 실물 크기대로 영인하여 간행하였고, 그 밖에 1962년 『국어학』 1호 등에도 영인본으로 수록되었다. 1985년 대제각에서 ‘국어국문학 총림 11’로 『월인석보』와 함께 영인하였으며, 2002년에는 대산문화재단의 해외 한국학 연구지원을 받아 함부르크 대학의 베르너 삿세(Werner Sasse), 안정희 교수팀에 의해 독일어로 번역된 것이 소학사에서 출간되기도 하였다.
활자본. 상 · 중 · 하 3권으로 되었으나, 현재 상권 1책과 중권의 낙장(落張)이 전할 뿐이다. 상권 1책과 중권 낙장이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2017년에 국보로 승격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상권과 중권의 낙장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석보상절』에 끼어 전한다.
『월인천강지곡』은 석가의 전생에서부터 도솔천에 하강하여 왕자로 태어나 성장[生長]하고, 화려한 결혼생활을 하면서 인생에 대한 번민으로 출가, 수도하여 불도를 깨치고, 장엄한 권능으로 중생을 교화, 제도하다가 열반하여 그 전신 사리를 신중[女僧]들이 봉안하고, 믿고 받들기[信仰]까지의 전 생애를 소설적인 구조로 서사화하였다.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 석가의 인격과 권능을 신화적으로 미화함으로써, 이 작품은 영웅의 일생을 찬탄하는 전형적인 서사시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월인천강’이라는 명칭 자체도 부처의 공덕을 칭송한 것으로서, 『월인석보』 권1의 첫머리에, “부톄 百億世界에 化身ᄒᆞ야 敎化ᄒᆞ샤미 ᄃᆞ리 즈믄 ᄀᆞᄅᆞ매 비취요미 ᄀᆞᆮᄒᆞ니라.(부처가 백억세계에 화신하여 교화하심이 달이 천 강에 비치는 것과 같으니라)”라고 한 주석에서 보듯이, 곧 부처의 본체는 하나이지만 백억세계에 화신으로 나타나서 중생을 교화하시는 것이 마치 달이 하나이지만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수많은 강에 비치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 말미암은 것이다.
별곡계통의 악장체를 집대성한 거작으로 자리를 굳혔고, 「용비어천가」와는 달리 일관된 서사성을 지님으로써 시가문학사상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곧 이 작품은 ‘이야기체 노래’로서 가사(歌辭)의 기본 형태를 나타내고 있으며, 가사문학의 형성과정에서 한시 계통의 가사 구조로부터 본격적인 가사에 이르는 중간에 자리하여 그 맥락을 이어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작품은 『월인석보』에 이르러 불교계 강창문학(講唱文學)의 대본이 되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상절부(詳節部)는 강설하는 부분이고, 월인부는 가창하는 대목으로 되어 있어서, 이것이 강창문학의 표본이라면 국문학의 소설사 내지 희곡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한글로 표기된 운문(韻文)으로서는 「용비어천가」 다음가는 최고(最古)의 자료로서, 장편서사시의 선구적인 작품이다.
『월인천강지곡』은 표기에 있어서 한글을 위주로 하고, 한자를 협주로 표기한 최초의 문헌이다. 이 한글 위주의 체재는 한자를 먼저 놓고 한글을 그 아래에 달아놓은 『월인석보』의 「월인천강지곡」 부분과 대조적이어서 한글을 존중한 세종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훈민정음으로 쓰여진 중세국어의 문헌자료들은 대부분 음소적 표기를 따르고 있는 반면에, 『용비어천가』와 함께 『월인천강지곡』은 ‘낱’, ‘앒’, ‘ᄂᆞᆾ’ 등과 같이 형태음소적 표기를 따르려는 노력이 나타나고 있어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사이시옷의 표기는 모두 ‘ㅅ’으로 통일되어 있으며, 한자음 표기에 있어서도 음가(音價) 없는 종성에 ‘ㅇ’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같은 중세국어의 문헌자료이지만, 『석보상절』 이후의 문헌에서는 동국정운식(東國正韻式) 한자음 표기의 한 특징으로서 위와 같은 환경의 종성에 ‘ㅇ’을 사용하였다.(예: 子 ᄌᆞᆼ) 이 밖에 중성(中聲)의 자형(字形)에 있어서도 ‘ㆍ’, ‘ㆎ’의 경우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점이 한글 자형의 변천을 아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한편, 활자는 『석보상절』과 똑같이 갑인자(甲寅字)인 한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와 함께 쓰인 한글 활자를 포함하여 서지학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월인천강지곡』은 『용비어천가』와 함께 최고의 국문시가로서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종교성과 문학성을 조화, 통일시킨 장편서사시로서, 인도문학의 걸작이라는 『불소행찬(佛所行讚)』과 대비되는 명작으로 평가된다. 최초의 한글활자본으로서, 중세국어의 언어를 연구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가치가 높은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내용이나 구조 및 표현상에 있에서도 완벽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데, 음곡(音曲)에 의하여 가창(歌唱)됨으로써 거기에 알맞은 운율로 조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의 묘사에서 서경이나 서정이 뛰어나고 수사법이 고루 갖추어짐으로써 수려한 서사시로 완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