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이 편찬하였다.
현재까지 확인된 『이담속찬』 이본(異本)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실린 3종[장서각 소장본 · 규장각 소장본 · 신조선사 간행본(刊行本)]의 필사본(筆寫本)과 호고당 간행본 · 광문사(廣文社) 간행본 · 광학서포(廣學書鋪) 활판본(活版本), 그리고 이들을 전사(傳寫)하거나 발췌(拔萃)하여 필사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 서울대학교 소장본 등 다수의 이본이 존재한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호고당 간행본이 초고본(草稿本)이고, 장서각 소장본이 최후에 만든 선본(善本)이다. 장서각 소장본은 42장의 필사본으로, 매 장마다 11행, 매 행마다 22자로 되어 있다.
책머리에 서문(序文)을 실었다. 서문에는 2가지 정보를 제시하였다. 먼저 명나라의 왕동궤가 엮은 『이담(耳談)』을 참조(參照)하여 빠진 것을 보충하고, 이익(李瀷)이 편찬한 『백언해(百諺解)』는 운(韻)을 맞추지 않았기에 운을 맞췄다는 점이다. 둘째, 신작(申綽)이 보내 준 10여 개의 중국 속담과 정약전(丁若銓)이 흑산도에서 수집한 수십 개의 우리나라 속담도 보충하였다는 점이다. 이어서 중국 속담 177장을 수록한 뒤, 이어서 ‘이하 동언(已下東諺)’이라 하여 우리나라 속담 161장을 기록한 뒤에 정약전이 보내준 60장을 추가로 써넣었다. 우리나라 속담 장수는 이본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마지막에는 ‘가경병진년[嘉慶丙辰, 1820]에 쓴다’는 표식도 넣었다.
중국 속담 177장 중에서 왕동궤의 『이담』의 영향권에 놓인 작품은 91장이다. 우리나라 속담은 이익의 『백언해』와 정약용이 31세 때인 1792년에 편찬한 『채파유의(采葩遺意)』를 참조하여 만들었다. 예컨대 『채파유의』에 실린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三歲之習, 至于八十]”가 『이담속찬』에도 그대로 수용된 것들이 그러하다. 또한 정약용은 『이담속찬』의 서문에서 밝혔듯이 『백언해』가 운에 맞지 않음을 지적하기도 했는데, 실제 『백언해』를 발췌하여 거기에 운을 맞춘 『백언시(百諺詩)』를 편찬하기도 했다. 이렇게 운을 맞춘 『백언시』를 『이담속찬』의 초고로 보기도 한다.
정약용이 『이담속찬』을 편찬한 것은 단순히 우리나라의 속담 채집에 목적을 두었던 것이 아니다. 백성의 진솔한 삶의 목소리를 담아 시처럼 누리고자 한 『시경』의 지향점과 유사하다. 이로써 『이담속찬』은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가졌던 사유(思惟)의 일단(一端)을 사회문화적 배경과 연관하여 살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