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저자는 최영년(崔永年, 1859~1935)이다. 최영년은 처음에는 독립협회(獨立協會) 활동을 하고, 광주에서 시흥학교(時興學校)를 설립하여 신교육 운동에 앞장섰지만, 이후 『국민일보』 사장을 비롯하여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 발기인으로 참석하는 등 친일 행위를 하였다. 신소설 작가 최찬식(崔瓚植)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1918년에 조선문예사에서 2권1책으로 출간하였다. 책 앞에 서문을 붙였다. 서문에는 애초 지난 겨울(1917년)에 여러 책에서 이야기를 발췌하여 ‘동연파적록(凍硯破寂錄)’이란 제목을 붙였는데, 실사를 제목에 내세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 친구의 충고를 받아들여 실사총담(實事叢談)이라 개명하였음을 밝혔다.
책 앞에 붙인 서문에 이어서 목차를 제시한 후, 목차 순서에 따라 이야기를 제시하였다. 상권에는 총 99편, 하권에는 총 166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었다. 모두 7언의 한문으로 제목을 붙였다. 내용은 한문에 국문으로 토를 달았다. 수록된 이야기는 이전 시대에 나온 여러 야담집에서 발췌하였다. 예컨대 『기문총화』, 『명엽지해』, 『죽창한화』, 『필원잡기』, 『공사견문록』, 『진휘속고』 등이 그러하다. 그 외에 동시대에 나온 『오백년기담』(1913) 등에서도 많은 이야기를 발췌하였다. 그런데 최소한 20여 편은 출처를 확인할 수 없다.
수록된 이야기는 앞서 간행된 『오백년기담』과 달리 시대순이 아닌 임의로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인물들의 일화를 중심으로 수록하여, 신라와 고려 인물 10여 명을 제외하면 모두 조선시대의 인물들이다. 이는 당시 사실성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라 할 만하다. 다만 사실성과 무관한 『명엽지해』에서 발췌한 작품들도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글쓰기 흐름과 다소 어긋나는 양상도 확인할 수 있다.
『실사총담』은 당시에 간행된 야담집의 여러 방향성을 엿보게 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동양에서는 다양한 ‘실사(實事)’를 드러냄으로써, 독자 스스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도록 한 전대의 글쓰기 방식을 취했다. 『실사총담』 역시 형식적으로는 이런 전통을 답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보다 앞선 1913년에 간행된 최동주(崔東洲)의 『오백년기담』과 대비해 보면 그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오백년기담』이 실사를 드러내면서도 특정한 목적을 부여하고자 했던 것과 달리, 최영년은 특정 목적보다 오락적 요소에 집중했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사실성에 기초한 야담의 글쓰기 방식과 오락성에 기초한 야담의 글쓰기의 방식의 변화 양상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