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만종(洪萬宗, 1643~1725)은 본관이 풍산이고, 자는 우해(于海), 호는 현묵자(玄默子)이다. 1666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지만, 1680년 허견(許堅) 사건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아 유배를 갔다. 1682년에 풀려났는데, 이 동안에 많은 저술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저술은 역사, 지리, 설화, 가요 등 폭넓게 이루어졌다. 홍만종의 저술로는 1705년에 편찬한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叢目)』을 대표로 『증보역대총목(增補歷代叢目)』, 『시화총림(詩話叢林)』, 『소화시평(小華詩評)』, 『시평보유(詩評補遺)』, 『해동이적(海東異蹟)』, 『순오지(旬五志)』, 『동국악보(東國樂譜)』, 『동국지지략(東國地志略)』 등이 있다. 그의 저술 대부분이 동국(東國), 즉 우리 것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고금소총』과 『명엽지해』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일본 동양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고금소총』에는 17세기 중반~18세기 초반에 향유된 잡록 5종에서 발췌한 이야기 54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 뒤에 ‘부명엽지해(附蓂葉志諧)’라는 작은 제목을 붙여 총 76편의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고금소총』이 전대 문헌에 실린 패설을 집대성하려고 했다면, 『명엽지해』는 패설에 대한 홍만종의 세계관을 담아낸 패설집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958년에 민속학자료간행회가 발간한 유인본(油印本)과 『손진태선생전집』 제3권에도 『명엽지해-부속지해(附續志諧)』가 있다.
『명엽지해』 첫머리에는 자서가 붙어 있다. 이에 따르면 저자는 병으로 서호(西湖)에 칩거할 때 촌사람들의 한담(閑談)을 듣고 틈틈이 기록해 두었다고 한다. 서문 마지막에는 “풍산 후인 현묵자가 서호정사에서 쓴다[豐山後人玄默子書于西湖精舍].”라는 정보도 남겼다. 책 마지막에는 허격(許格)이 쓴 발문도 있다. “어떤 작품에는 의단을 붙이고 어떤 작품에는 비유만 하기도 하였다. 비록 유희에 근간을 두었지만 권계를 깃들이기도 하였다.”라는 허격의 지적처럼, 『명엽지해』는 형식과 내용 모두가 이전과 다른 양상을 띤다.
제목은 작품의 내용 중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집약한 4언의 한문으로 제시하였다. 작품에는 논평도 붙였는데, 절반 남짓에만 논평을 붙였다. 이는 홍만종이 지닌 패설관의 한 부분이라 할 만하다. 즉 패설에는 논평을 붙일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논평을 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나름대로의 생각을 담은 것이다.
『명엽지해』에 수록된 내용도 다양하다. 사대부 일화적인 속성을 보이는 것이 있는가 하면, 음설적인 이야기도 수록되어 있다. 분량 면에서도 「기롱장백(妓籠藏伯)」이나 「완악파쉬(腕樂罷倅)」처럼 비교적 장편이 있는가 하면, 「교방불출(橋榜不出)」이나 「호승지함(呼僧止醎)」처럼 50~60여 자 안팎의 이야기도 있다. 이 역시 논평과 마찬가지로, 작품의 세계관이나 분량도 다양해야 한다는 그의 패설관이 작동한 결과이다.
홍만종은 『고금소총』을 통해 동국의 패설을 집대성하고, 『명엽지해』를 통해 나름대로 동국 패설이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제시하였다. 그 방향은 개인적인 목적성을 되도록이면 제거하고, 패설이 지닌 갈래적 속성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