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10책.
중국 송나라 온릉계환(溫陵戒環)이 핵심이 되는 부분을 풀이한 책에 세조가 한글로 구결을 달고 번역하였다. 활자본·목판본의 두 종이 있는데 활자본은 1461년(세조 7)에, 목판본은 1462년에 간행되었다. 목판본은 같은 판목으로 1472년(성종 3)과 1495년(연산군 1)에 다시 간행되었다.
세조와 신미(信眉)·김수온(金守溫) 등의 발문에 의하면, 원래 1449년(세종 31) 세종의 명령에 따라 수양대군(首陽大君 : 뒤의 世祖)이 번역에 착수하였으나 끝내지 못하고 미루어졌는데, 1461년 5월 석가모니의 분신사리(分身舍利) 100여 매가 나타나고,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이 책과 ≪영가집 永嘉集≫의 번역을 세조에게 청하자, 세조가 번역을 끝내고 그 해 10월교서관(校書館)에서 을해자(乙亥字)로 400부를 간행하였다고 한다.
번역은 세조가 손수 한 것이란 뜻에서 뒤의 기록에서는 어역(御譯)이라 되어 있으나, 위의 발문에 의하면 실제로는 여러 사람이 분담하여 이루어졌다. 즉, 세조는 구결을 달아 혜각존자(慧覺尊者)신미에게 옳고 그름을 따져 밝히게 하여 구두(句讀)를 바르게 하고, 그에 따라 한계희(韓繼禧)·김수온이 번역하였는데, 그 번역을 신미 등 명승이 교정하고 세조가 본 뒤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이 밖에 본문을 서로 견주어 고찰하는 것과 예문의 손질, 한자음의 표기 등도 각기 분담했다.
그런데 이 활자본은 급히 서둘러 간행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 많아 이를 수정하여 이듬해인 1462년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목판으로 다시 간행하였다. 그 책에는 간경도감 도제조(都提調)인 계양군 증(桂陽君璔)의 전문(箋文, 1462년 8월 21일자)과 조조관(雕造官)인 간경도감 도제조 이하 관원의 관직과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목판본의 간행년에 대하여 문제가 없지 않으나, ‘解脫’의 ‘解’자가 ≪월인석보 月印釋譜≫와 같이 ‘갱’으로 되어 ‘ㅎ항’으로 된 ≪법화경언해≫ 이후의 책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전문의 연대대로 간행년을 잡는다.
이때 잘못된 곳이 있는 활자본은 대부분 거두어서 붉은 먹으로 교정하거나 인쇄한 쪽지를 덧붙임으로써 목판본과 통일을 기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남아 있는 활자본의 대부분이 그러한 수정을 보여준다.
목판본은 목판을 자르거나 구멍을 내어 깁거나, 인쇄한 글자를 오려 붙이는 식의 한자음 표기의 수정, 예컨대 위 ‘解脫’의 ‘解’자와 ‘阿難’의 ‘阿’자가 ‘○’에서 ‘○’, ‘般若’의 ‘般’자가 ‘반’에서 ‘○’로 되고 안 되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책의 활자본은 활자 연구와 현존본의 희소가치 때문에 귀중한 자료로 다루어진다. 목판본은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최초의 언해본으로서 간경도감의 다른 언해본에 대하여 책의 형태는 물론, 번역의 양식과 정서법에 걸쳐 규범이 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번역양식은 철저한 직역인데, 원문에 한글로 구결이 달린 대문(大文)을 먼저 보이고, 이어서 번역을 쌍행으로 싣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문자와 정서법은 구결과 번역문에서 그 차이를 보이는데, 구결 표기에는 방점과 ‘ㅭ’, 각자병서(各自並書)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번역문에서는 반드시 방점이 나타나고, 관형형 어미의 표기에 ‘○디니·홀띠니’, ‘ᄒᆞᇙᄉᆡ·ᄒᆞᆯᄊᆡ’ 등과 같이 받침 ‘ㅭ’이나 ‘ㄹ’과 각자병서가 쓰인다.
그 밖에는 구결과 번역문의 표기가 같은데, 순경음 ‘○’이 쓰이지 않으나 오직 하나의 예외로 ‘ᄌᆞ○(礫)’이 있다. 사잇소리가 일반적으로 ‘ㅅ’으로 통일되어 표기된다.
주격형(主格形)의 표기에서는 ‘如來ㅣ·義ㅣ·對ㅣ’와 같이 ‘ㅣ’로 끝난 체언에 주격조사 ‘ㅣ’를 쓰고 있는 것이 특이한데 이는 문법구조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번역문에서는 한자마다 ≪동국정운 東國正韻≫에 따른 독음이 달려 있다. 발문에 의하면 이 독음은 전문가인 조변안(曺變安)과 조지(趙祉)가 달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간경도감의 ≪법화경언해≫·≪금강경언해≫ 등에서 완전히 일치되어 나타나고 다른 언해본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요컨대, 이 책은 간경도감의 다른 언해본에 미친 영향의 관점에서도 중요하지만, 풍부한 어휘와 문법자료를 보이고 있으므로, 중세국어 연구에 기본적인 문헌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현재 활자본은 권3·4만 없고 모두 남아 있다.
권1은 성암문고(誠庵文庫), 권2는 서울대학교, 권5는 서울대학교 가람문고와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 권6은 덴리대학, 권7은 연세대학교, 권8은 동국대학교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권9는 김형규(金亨奎)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권10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등에 소장되어 있다.
목판본은 1462년에 인쇄된 책과, 1462년의 판목으로 1472년과 1495년에 인쇄된 책이 서울대학교와 동국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특히, 동국대학교 소장본은 책의 겉제목 표기까지도 15세기의 것인데, 이것을 저본으로 한 영인본이 1959년 동국대학교에서, 다시 1977년대제각(大提閣)에서 간행되어 널리 보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