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 약 10.1km. 일명 천마산성·성거산성이라고도 한다. 이 성은 고려시대의 피란성(避亂城)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초축(初築)연대는 알 수 없다.
1676년(숙종 2) 대장 유혁연(柳赫然)이 다시 쌓았는데 당시는 주위가 5,975보(步)이고 첩(堞)이 1,530개였다. 문은 북문·남문·동문·서문·소동문(小東門)·소서문(小西門) 등 6개가 있다.
성의 밖은 매우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성내는 평평하다. 성의 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는 한 줄기 시냇물이 박연폭포(朴淵瀑布)를 이룬다. 처음은 별장(別將)을 두어 관리하였으나 나중에 중군(中軍)에서 관리하였다.
또한, 기패관(旗牌官) 2인, 수첩군관(守堞軍官) 400인, 별파군(別破軍) 120인, 순령수(巡令手) 40인, 취고수(吹鼓手) 40인, 대기수(大旗手) 40인, 성기군(城機軍) 40인, 대포수(大炮手) 15인, 영리(營吏) 6인, 통인(通引) 3인, 노(奴) 11구, 비(婢) 10구, 승총섭(僧摠攝) 1인을 두었다.
성 안에는 예로부터 3창(倉)이 있어 6개 읍(邑)이 조적(糶糴)을 분담하였는데, 북창(北倉)에는 금천(金川)·평산(平山)이, 내창(內倉)에는 풍덕(豊德)이, 동창(東倉)에는 장단(長湍)·파주(坡州)·적성(積城)이 속하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는 금천과 장단만이 이를 맡아 조달하였다. 또, 대흥사(大興寺)에 승창(僧倉)이 있어 군기고·화약고 등을 두었으며, 각 창에는 모두 군량미를 비축하여두었다. 성 내외에 제승당(制勝堂)·영청당(永淸堂)·대승당(大乘堂)이 있고 수성장(守城將)은 중군이 겸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