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들어 온 은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에 와서야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1503년(연산군 9) 조선에서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이 개발되어 일본으로 전파된 뒤, 일본 내부의 은 생산이 크게 늘어났다. 일본이 세계적인 은 생산, 수출국으로 성장하면서 1530년대부터 조선으로도 일본 은이 대거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일본 은의 유입은 잠시 주춤했으나, 1609년(광해군 1) 조선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로 재개되었다. 호란과 명·청 교체, 동아시아 무역 환경 변화, 일본 내부의 은 수출 억제 등으로 부침은 있었으나 일본 은은 18세기 중엽까지 지속적으로 조선에 유입되었다.
조선 왕조는 초기부터 국내에서 생산된 은으로 내부 수요를 충당하였으며, 그 이상의 생산은 중국으로의 유출을 우려하여 억제하였다. 연은분리법의 개발로 국내 생산이 크게 늘어나면서 정부의 억제에도 불구하고 조선 은의 대중국·일본 유출이 늘어났다. 연은분리법은 일본으로도 전파되어 일본 내부의 은광 개발과 생산을 자극하였다. 그리하여 16세기 일본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은을 생산하여 해외로 수출하였으며, 그 대부분은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일본 은은 나가사키[長崎]와 쓰시마[對馬島]를 통해 수출되었는데, 조선으로 들어와 중국으로 흘러 간 은은 쓰시마를 경유하고 있었다. 일본 은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1530년대부터이나, 그 규모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양란과 명말 청초의 혼란을 거쳐 조선과 일본, 조선과 중국과의 관계가 안정되면서 잠시 주춤했던 일본 은이 다시 조선으로 대거 유입되었다. 사무역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 온 일본 은에 관한 기록은 1684~1752년분이 남아 있다. 이 시기 많게는 한 해 27만 냥 이상의 일본 은이 조선으로 유입되어 대중국 외교와 무역 자금으로 활용되었다.
동아시아 은 교역 체제는 일본의 나가사키에서 중국의 동남부로 이어지는 길과 쓰시마에서 조선을 거쳐 중국의 북동부로 연결되는 길이 있었다. 조선이 개입된 은 교역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에 정점을 이루고 18세기 전반까지는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일본 은의 생산과 수출이 감소하면서 조선으로의 유입량도 줄어들었다. 1730년대는 그 양이 매년 10만 냥, 1740년대는 매년 5만 냥 이하로 떨어졌고, 1752년(영조 28) 1천 냥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기록에서 사라졌다.
일본 은의 유입 감소와 함께 그 품질도 일시적으로 떨어졌다. 1697년(숙종 23) 순도 80%인 기존의 경장은(慶長銀) 대신 63%인 원록은(元錄銀)이 새롭게 주조되어 1699년부터 조선에서도 사용되었다. 이는 조선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일본 내에서는 품질이 낮은 저순도의 은을 사용하되, 1712년(숙종 38)부터 조선에는 순도 80%의 특주은(特鑄銀)이 보급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이후 일본 내에서 유통되는 은의 순도 변화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80%의 은이 사용되었으나, 유입량의 감소는 지속되었다.
일본 은의 유입이 감소, 단절되는 방향으로 흐르면서 조선에서는 대중국 외교와 무역 자금의 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조선은 국내 은광을 개발하고 주력 수출품을 홍삼으로 대체해 나갔다.
조선은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은광의 개발과 생산을 억제하였으나, 16세기 이후 일본 은이 본격적으로 유입되었다. 조선은 일본 은을 대중국 외교와 무역 자금으로 적극 활용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동아시아 은 교역 체제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또한 국내에서도 고액 거래를 중심으로 은의 유통이 증가하였으나, 18세기 들어 점차 일본 은의 유입이 감소하면서 국내 생산과 대외 무역 구조에 변화가 발생하였다. 이는 동아시아 교역, 조선 내부의 유통과 소비라는 관점에서 은의 역할을 재조명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