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시대 일본에서 들어 온 은화 혹은 은괴.
개설
연원 및 변천
일본 은은 나가사키[長崎]와 쓰시마[對馬島]를 통해 수출되었는데, 조선으로 들어와 중국으로 흘러 간 은은 쓰시마를 경유하고 있었다. 일본 은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1530년대부터이나, 그 규모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양란과 명말 청초의 혼란을 거쳐 조선과 일본, 조선과 중국과의 관계가 안정되면서 잠시 주춤했던 일본 은이 다시 조선으로 대거 유입되었다. 사무역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 온 일본 은에 관한 기록은 1684~1752년분이 남아 있다. 이 시기 많게는 한 해 27만 냥 이상의 일본 은이 조선으로 유입되어 대중국 외교와 무역 자금으로 활용되었다.
동아시아 은 교역 체제는 일본의 나가사키에서 중국의 동남부로 이어지는 길과 쓰시마에서 조선을 거쳐 중국의 북동부로 연결되는 길이 있었다. 조선이 개입된 은 교역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에 정점을 이루고 18세기 전반까지는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일본 은의 생산과 수출이 감소하면서 조선으로의 유입량도 줄어들었다. 1730년대는 그 양이 매년 10만 냥, 1740년대는 매년 5만 냥 이하로 떨어졌고, 1752년(영조 28) 1천 냥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기록에서 사라졌다.
일본 은의 유입 감소와 함께 그 품질도 일시적으로 떨어졌다. 1697년(숙종 23) 순도 80%인 기존의 경장은(慶長銀) 대신 63%인 원록은(元錄銀)이 새롭게 주조되어 1699년부터 조선에서도 사용되었다. 이는 조선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일본 내에서는 품질이 낮은 저순도의 은을 사용하되, 1712년(숙종 38)부터 조선에는 순도 80%의 특주은(特鑄銀)이 보급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이후 일본 내에서 유통되는 은의 순도 변화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80%의 은이 사용되었으나, 유입량의 감소는 지속되었다.
일본 은의 유입이 감소, 단절되는 방향으로 흐르면서 조선에서는 대중국 외교와 무역 자금의 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조선은 국내 은광을 개발하고 주력 수출품을 홍삼으로 대체해 나갔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肅宗實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통문관지(通文館志)』
- 『만기요람(萬機要覽)』
- 『왜관』(다시로 가즈이 저·정성일 역, 논형, 2005)
- 『조선시대광업사연구』(유승주,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3)
-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 조선의 은 유통」(권내현, 『역사학보』221, 2014)
- 「조선과 일본의 은 유통 교섭(1697~1711)」(정성일, 『한일관계사연구』42, 2012)
- 「조선시대 은 유통과 소비문화」(이헌창, 『명청사연구』36, 2011)
- 「17세기 초 은의 유통과 그 영향」(한명기, 『규장각』15,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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