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대 ()

목차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 전기 시정(時政)을 논하고 풍속을 교정하며, 백관의 규찰 · 탄핵을 맡아보던 관서.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고려 전기 시정(時政)을 논하고 풍속을 교정하며, 백관의 규찰 · 탄핵을 맡아보던 관서.
내용

1010년(현종 1) 거란침입 이후 백관에 지급할 녹봉이 부족하여 중추원사(中樞院使) 장연우(張延祐)와 일직(日直) 황보 유의사(皇甫兪義司) 등은 왕에게 건의하여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아 백관의 녹봉에 충당케 하도록하였다.

문치를 숭상하고 무(武)를 경시하는 정책에 불만을 품어오던 무신들은, 이에 불만을 품은 상장군 김훈(金訓)·최질(崔質) 등이 1014년 11월 여러 위(衛)의 군사들과 더불어 난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하고 장연우와 황보 유의를 귀양보내고 무관 상참(常叅) 이상은 모두 문관직을 겸하였다.

그리고 무신들은 왕에게 청하여 전대의 어사대(御史臺)를 혁파하고 금오대를 설치, 관원으로서 사(使)·부사(副使)·녹사(錄事)를 두었으나 모도 상임 인원은 없었다.

그러나 금오대는 그 이듬해 3월김훈 등 무신 19인이 처형되면서 혁파되고, 어사대는 사헌대(司憲臺)로 개칭되었고, 관원으로는 대부(大夫)·중승(中丞)·잡단(雜端)·시어사헌(侍御司憲)·전중시어사헌(殿中侍御司憲)·감찰사헌(監察司憲)을 두었다. 이와 같이 금오대는 현종 5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존치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시대대간제도연구(高麗時代臺諫制度硏究)』(박용운, 일지사, 1981)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어사대(御史臺)에 관한 일연구(一硏究)」(송춘영, 『대구사학(大丘史學)』 3, 1971)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