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사』 백관지에 수록된 1076년(문종 30)의 문산계를 보면, 1품(品)부터 9품까지 각 품마다 정 · 종(正 · 從)을 나누고, 정4품 이하에는 다시 상 · 하를 두었다. 당나라의 제도처럼 정1품 없이 종1품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부터 종9품 하 장사랑(將仕郎)까지 9품 29계를 이루었다. 이처럼 관인의 등급을 9품으로 나눈 제도는 이후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문산계를 건국 초기부터 사용한 것은 아니다. 건국 직후에는 아찬(阿粲), 중아찬(重阿粲) 등의 신라식 품계와 궁예가 마진(摩震) 때인 904년에 정한 정광(正匡), 대상(大相), 원윤(元尹) 등의 품계를 함께 사용하다가, 923년(태조 6) 무렵부터는 후자가 중심이 되었다. 건국 초의 이러한 품계는 중앙 관료와 지방 세력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위계였다.
그런데 건국 초의 금석문에는 광록대부(光祿大夫), 통직랑(通直郎), 봉의랑(奉議郞) 등 중국식 문산계를 사용한 사례도 나타난다. 그러한 문산계는 사신이나 유학생 등이 중국에 갔을 때 그 나라에서 수여 받은 것이거나 또는 광종이 개혁 정치를 할 때 중국의 문산계를 수용하여 종래 사용하던 품계와 이원적으로 병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뒤 성종 때에 당 · 송의 제도를 수용하여 여러 정치 제도를 정비하면서 995년(성종 14)에 문산계와 무산계(武散階)를 제정하였다. 그렇지만 그 두 품계를 각각 문반과 무반의 관계로 이용한 것은 아니었다. 문반과 무반이 공통적으로 문산계를 사용하였으며, 무산계는 향리, 탐라 왕족, 여진 추장, 나이 든 군인, 공장(工匠), 악인(樂人) 등에게 명예적인 칭호로 부여하였다. 문반과 무반의 품계를 각각 문산계와 무산계로 구분하여 사용한 조선이나 중국의 당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처럼 문산계를 제정하여 문무 관인의 일원적 품계로 사용하면서, 이전에 사용하던 품계는 향직(鄕職)이 되었다. 향직을 향리의 품계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향리, 군인, 서리, 여진 추장 등에게 수여하는 작(爵)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 다시 말하여 문산계를 제정한 이후 무산계와 향직은 특정한 부류에게 수여하는 명예적 위계로 활용하였다.
고려 사회가 발전하여 전성기를 달하였던 문종 때에 문산계를 정비하였다. 그 때 개정하였다고는 하지만 29계의 상당수가 성종 때 이래 이미 사용되어 온 것이고, 2~3품의 품계 명칭 정도만 바꾸는 데 그쳤다.
그 뒤 고려가 원의 세계 질서 속에 편입되자 그 압력을 받아 대폭 개정하게 되었다. 1275년(충렬왕 1)에 제후국 체제에 맞게 관제를 격하하여 개편하면서 문산계도 고쳤다. 1298년(충선왕 즉위년)에는 지난 개편 당시 상하 관계에 있는 관부들의 격이 뒤바뀌는 등 왜곡이 발생하였던 부분을 시정하고 원나라의 관제를 채용하여 개혁하면서 문산계도 개정하였다.
그러나 정국이 변화하여 충선왕이 8개월 만에 퇴위하고 충렬왕이 복위하여 문산계를 다시 개정하였다. 그 뒤 1308년(충렬왕 38)에 충선왕이 복위하자 관제를 다시 개혁하면서 문산계도 정1품을 신설하고 5품 이하에서 정, 종의 구분을 없애는 등 크게 고쳤다.
문산계를 다시 대폭 개정한 것은 공민왕이 반원개혁을 할 때였다. 1356년(공민왕 5)에 옛 제도, 곧 문종 대의 제도로 환원한다는 원칙 아래 관제를 개정하였는데, 문산계는 충선왕 대의 개혁 등으로 바뀐 내용도 반영하였다.
그 뒤 1362년(공민왕 11), 1369년(공민왕 18), 1372년(공민왕 21)에도 개정하였다. 문종 때 정비된 문산계의 내용과 이후의 주요 변천사항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연도 | 1076(문종 30) | 1275(충렬왕 1) | 1298(충선왕 즉위) | 1308(충선왕 복위) | 1356(공민왕 5) | 1369(공민왕 18) | ||
---|---|---|---|---|---|---|---|---|
품계 | ||||||||
1품 | 정 | 상 | 삼중대광(三重大匡)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특진보국삼중대광(特進輔國三重大匡) | |||
하 | 의동삼사(儀同三司) | 특진삼중대광(特進三重大匡) | ||||||
종 | 상 |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숭록대부(崇祿大夫) | 중대광(重大匡) |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 삼중대광(三重大匡) | ||
하 | 금자숭록대부(金紫崇祿大夫) | 중대광(重大匡) | ||||||
2품 | 정 | 상 | 특진(特進) | 흥록대부(興祿大夫) | 광정대부(匡靖大夫) |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 광록대부(光祿大夫) | |
하 | 은청영록대부(銀靑榮祿大夫) | 숭록대부(崇祿大夫) | ||||||
종 | 상 |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 광정대부(匡靖大夫) | 정봉대부(正奉大夫) | 통헌대부(通憲大夫) | 광록대부(光祿大夫) | 영록대부(榮祿大夫) | |
하 | 영록대부(榮祿大夫) | 자덕대부(資德大夫) | ||||||
3품 | 정 | 상 |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 중봉대부(中奉大夫) | 정의대부(正議大夫) | 정순대부(正順大夫) | 정의대부(正議大夫) | 정의대부(正議大夫) |
하 | 봉순대부(奉順大夫) | 통의대부(通議大夫) | 통의대부(通議大夫) | |||||
종 | 상 | 광록대부(光祿大夫) | 원나라의 제도와 견줄만한 것들은 모두 고침 | 통의대부(通議大夫) | 중정대부(中正大夫) | 대중대부(大中大夫) | 대중대부(大中大夫) | |
하 | 중현대부(中顯大夫) | 중대부(中大夫) | 중정대부(中正大夫) | |||||
4품 | 정 | 상 | 정의대부(正議大夫) | 대중대부(大中大夫) | 봉상대부(奉常大夫) | 중산대부(中散大夫) | 중산대부(中散大夫) | |
하 | 통의대부(通議大夫) | 중의대부(中議大夫) | ||||||
종 | 상 | 대중대부(大中大夫) | 중대부(中大夫) | 봉선대부(奉善大夫) | 조산대부(朝散大夫) | 조산대부(朝散大夫) | ||
하 | 중대부(中大夫) | 조열대부(朝列大夫) | ||||||
5품 | 정 | 상 | 중산대부(中散大夫) | 중산대부(中散大夫) | 통직랑(通直郎) | 조의랑(朝議郎) | 조의랑(朝議郎) | |
하 | 조의대부(朝議大夫) | 조의대부(朝議大夫) | ||||||
종 | 상 | 조청대부(朝請大夫) | 조청대부(朝請大夫) | 조봉랑(朝奉郎)) | 조봉랑(朝奉郎)) | |||
하 | 조산대부(朝散大夫) | 조산대부(朝散大夫) | ||||||
6품 | 정 | 상 | 조의랑(朝議郎) | 조의랑(朝議郎) | 승봉랑(承奉郎) | 조청랑(朝請郞) | 조청랑(朝請郞) | |
하 | 승의랑(承議郎) | 승의랑(承議郎) | ||||||
종 | 상 | 봉의랑(奉議郞) | 봉의랑(奉議郞) | 선덕랑(宣德郎) | 선덕랑(宣德郎) | |||
하 | 통직랑(通直郎) | 통직랑(通直郎) | ||||||
7품 | 정 | 상 | 조청랑(朝請郞) | 조청랑(朝請郞) | 종사랑(從事郎) | 수직랑(修職郞) | 수직랑(修職郞) | |
하 | 선덕랑(宣德郎) | 선덕랑(宣德郎) | ||||||
종 | 상 | 선의랑(宣議郎) | 선의랑(宣議郎) | |||||
하 | 조산랑(朝散郎) | 조산랑(朝散郎) | ||||||
8품 | 정 | 상 | 급사랑(給事郎) | 급사랑(給事郎) | 징사랑(徵事郎) | 승사랑(承事郞) | 승사랑(承事郞) | |
하 | 징사랑(徵事郎) | 징사랑(徵事郎) | ||||||
종 | 상 | 승봉랑(承奉郎) | 승봉랑(承奉郎) | |||||
하 | 승무랑(承務郎) | 승무랑(承務郎) | ||||||
9품 | 정 | 상 | 유림랑(儒林郎) | 유림랑(儒林郎) | 통사랑(通仕郎) | 등사랑(登仕郞) | 등사랑(登仕郞) | |
하 | 등사랑(登仕郞) | 등사랑(登仕郞) | ||||||
종 | 상 | 문림랑(文林郎) | 문림랑(文林郎) | |||||
하 | 장사랑(將仕郎) | 장사랑(將仕郎) | ||||||
〈표〉 문종대 정비된 문산계의 내용과 이후의 주요 변천사항 |
〈표〉에서 볼 수 있듯이 문산계는 크게 상부의 대부(大夫) 계열과 하부의 낭(郞) 계열로 구분하였다. 고려 전기에는 5품과 6품 사이를 경계로 구분하였다가, 1308년 개정부터는 4품과 5품 사이로 경계를 상향하였다.
대부 계열의 문산계는 대체적으로 3성, 6부, 시(寺) · 감(監) 계통 관청의 장차관이나 그에 준하는 위치에 있는 관직들의 품계였다. 또한 대부 계열에서 대체로 2품 이상이 재추(宰樞)로서 중요한 국정을 논의하는 재상이 되었다.
낭 계열에서는 대체로 6품과 7품 사이를 경계로 하여 그 위를 참질(參秩) 또는 참상(叅上), 아래를 참외(參外) 또는 참하(叅下)라고 구분하고, 참상관이 되어야 국정을 논의하는 조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경계는 유동적이어서, 중추원의 정3품직은 재상이었고, 5품이면서 참하관이거나 7품이면서 참상관인 경우가 있었다.
문산계가 관인의 위계를 나타내기는 하지만, 고려 전기에는 문산계와 관직이 품계를 기준으로 일치하지 않았다. 고려가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였지만 문산계에 맞추어 관직 직사에 임용하는 원칙을 따르지 않았다.
문산계와 관직의 본품(本品) 사이에 2~3품의 차이가 나는 일이 많았다. 예를 들면 호부 상서와 형부 상서는 동일하게 정3품 관직이었지만, 정5품 하 조의대부로서 호부 상서를 맡고, 종5품 하 조산대부로서 형부 상서를 맡은 사례가 있다.
정5품 형부 낭중이면서 정9품 하 등사랑을 보유한 사례와 정6품 병부 원외랑이나 종6품 우정언 등의 직사를 맡으면서 문산계상으로는 종9품 하 장사랑을 소지한 사례도 있다. 동일한 품계를 소지하였더라도 직사는 품계가 다른 여러 관직에 임용될 수 있었고, 한 관직에 재직하는 도중에 그가 소지한 문산계가 바뀔 수도 있었다.
문산계가 높고 관직의 품계가 낮을 때 관직 앞에 행(行), 반대로 문산계가 낮고 관직의 품계가 높을 때 관직 앞에 수(守)를 붙이는 행수법이 있었지만, 고려 전기에는 그런 행수법이 시행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1105년(숙종 10)에 사망한 정목(鄭穆)의 묘지명을 보면 최종 관력을 문산계는 종5품 조산대부, 산직은 종3품 검교예빈경(檢校禮賓卿), 실직은 종3품 행섭대부경(行攝大府卿)으로 표기하였는데, 관직 앞에 수를 붙여야 하는 행수법에 맞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시대에 행수법을 사용하기는 하였지만 그 용법이 원래와 달리 산직과 실직의 품계를 비교하여 양자의 고하에 따라 실직 앞에 행이나 수를 붙였다고 이해하거나, 산직과 실직을 동시에 보유한 경우에 두 직을 구분하기 위하여 실직 앞에 행이나 수를 붙였다고 이해하는 견해가 있는데, 후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이처럼 문산계와 관직 품계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산계보다 관직별로 정해진 녹봉 액수가 관인의 지위를 보다 정확하게 반영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아직 본직과 겸직의 구분을 둘러싸고 견해의 차이가 있지만, 문종 대 관제를 보면 특정 관직은 그와 더불어 정해진 지위, 즉 반차(班次)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성종 대 이후 녹봉과 전시과 제도에서 문산계를 지급 기준으로 삼지 않고 각 등급마다 대상 관직을 일일이 명기한 것은 관인의 지위를 나타내는 기준이 문산계가 아니라 그 본직이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고려 후기에 관료 제도가 변화하는 가운데 충렬왕 때부터 문산계와 관직 품계 사이의 격차를 줄이고자 하였다. 충렬왕 때에는 양자 사이의 격차가 고려 전기보다 절반 이하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1308년 충선왕이 복위하여 관제를 개혁한 이후로는 문산계에 맞추어 직사를 맡기는 원칙을 어느 정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