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관아에서 동급 이하의 관아 또는 개인에게 하달하는 관문서의 일종이다. 첩(帖)은 ‘체’라고도 읽는다. 관첩에는 발급하는 관아, 수령하는 관아 또는 개인, 하달 내용, 발급 일자와 담당자 등을 기록하였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고려시대의 관첩 사례는 939년(고려 태조 22) 도평성(都評省)에서 자적선사(慈寂禪師) 홍준(洪俊)의 문도에게 선원 건립을 허가하는 내용으로 하달한 것과, 1345년(충목왕 원년)경에 관리 임명장을 차첩(差帖)이라고 부른 것 정도가 확인될 뿐이다. 대신에 첩(帖)보다는 첩(貼)이라는 관문서가 많이 사용되었다.
관리나 사심관(事審官), 호장(戶長) 등을 임명할 때, 동급 또는 하급의 관아나 개인에게 하달할 때 등에 첩(貼)을 내린 것은 고문서로도 확인할 수 있다. 1198년(신종 원년)에 장성감무관(長城監務官)이 그 지역 향리 조직인 군사(郡司)에게 내린 첩(貼)의 사례가 있다.
내용은 백암사(白巖寺, 지금의 백양사) 중연(中延) 스님이 왕을 위한 불사를 하면서 자신의 법손이 백암사를 승계하게 해달라고 소지(所志)를 올렸는데, 이를 중앙에서 결정한 다음 승록사(僧錄司)가 장성감무에게 내린 첩(貼)을 다시 감무가 군사에게 내린 것이다.
1357년(공민왕 6)에 백암사의 주지 임명 건에 관하여 왕명을 받아 처리한 내용을 승록사에서 전라도 안찰사에게 통보한 첩(貼)도 볼 수 있다. 1262년(원종 3) 상서도관(尙書都官)에서 왕명에 따라 첨서추밀원사 유경(柳璥)에게 발급한 첩(貼)은 최씨 정권을 무너뜨린 공신들을 포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재 볼 수 있는 고려시대의 첩(帖)과 첩(貼)에는 공통적으로 이두를 사용하였고 용도도 비슷하다. 그렇지만 첩(帖)의 용례가 아주 드물어서 첩(貼)과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또는 바뀐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중국의 제도와 비교하면, 당나라에서 중서문하(中書門下)와 절도사, 지방관 등이 첩(帖)을 사용하였으며, 문서 구조상 고려의 도평성첩과 유사하였다. 송대(宋代)에는 첩의 양식이 당나라의 것과 많이 달라지고 주(州)에서 현(縣)에 내리는 문서로 주로 사용하였으며, 명대(明代)의 첩 양식은 송나라의 것에서 큰 변화가 없었다.
조선은 초기에 명나라의 홍무예제(洪武禮制)에 규정된 하첩식(下帖式)에 따르되 조선의 실정에 맞게 고쳐서 사용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에 첩을 관문서 양식의 하나로 규정하여 상급 관청에서 7품 이하에 보낼 때 사용한다고 하였다. 이후 큰 변화가 없었고, 관리 임명, 명령 하달, 허가 증빙 등 다양한 목적으로 첩을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