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아버지는 군장(郡長) 정문도(鄭文道)이며, 장인은 검교장작감(檢校) 고익공(高益恭)이다. 정목(鄭穆)은 부인 고씨(高氏)와의 사이에서 네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정점(鄭漸)·정택(鄭澤)·정항(鄭沆) 등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 중 막내인 정항의 아들이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은 정서(鄭敍, 鄭嗣文)이다.
본래 동래의 향리(鄕吏) 출신이다. 18세 때 개경(開京)에 올라와 유학하여, 27세 되던 1066년(문종 20)에 성균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1072년(문종 26)에 치러진 예부시(禮部試)의 복시(覆試)에서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관직에 나아가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 군기주부(軍器注簿), 고주통판(高州通判)을 역임하였다. 이후 영청현(永淸縣, 지금의 평안남도 평원군 영유면)의 수령이 되었는데 마침 가뭄이 들자 토지를 개간하여 백성들의 곤궁을 덜어주었고, 요(遼)의 봉책사(封冊使) 일행을 잘 접대하였다. 그 공으로 접반사(接伴使) 소태보(邵台輔)의 추천으로 직사관(直史館)에 임명되어 『선종실록(宣宗實錄)』을 편찬하였다. 1093년(선종 10)에는 동계(東界) 지역이 기근에 시달리자 ‘7주 춘하번 동북면병마판관 갑장별감 겸 선무(七州 春夏番 東北面兵馬判官 甲仗別監 兼宣撫)’가 되어 곡식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뒤에 금주(金州)의 수령이 되어서는 100여 위(位)의 신령(神靈)을 받드는 제사를 없애는 등 미신을 척결하기도 하였다.
이후 감찰어사(監察御史),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기거랑(起居郞), 형부시랑(刑部侍郞), 예부시랑(禮部侍郞) 등 요직을 거쳤다. 검교예빈경 행섭대부경(檢校禮賓卿 行攝大府卿)으로서 1105년(숙종 10) 6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