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은병은 고려 전기 숙종 대에 표인(標印)하여 유통한 법정 은화이다. 숙종이 1097년(숙종 2)에 주전관을 설치하며 동전의 주조와 유통을 시작하였고, 1101년(숙종 6)에는 기존에 칭량 화폐의 역할을 하던 은(銀)을 제도권으로 편입하여 은병에 표인하여 유통하기 시작했다. 이후 원 간섭기 원의 지폐 보초(寶鈔)가 유입되며 은이 대량 유출되자 1331년(충혜왕 1)에는 은병의 유통을 금지하고 새로이 소은병을 제작하여 유통하는 제도 변화를 시도하였다. 고려시대 주조된 금속 화폐 중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유통되었으며 고액권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정의
고려 전기, 숙종 대에 표인(標印)하여 유통한 법정 은화.
제정 목적
내용
은병은 은 1근으로 우리나라의 지형을 본떠 병(甁) 형태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일반에서는 이를 활구(闊口)라고도 하였다. 그것은 병의 구멍은 작은 것이 보통이나 활구는 위가 넓었기 때문에 그렇게 칭한 것이었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은 1근에 해당하는 은병은 은으로만 만든 것이 아니었다. 1근의 은병은 은 12냥 반, 동 2냥 반으로 총 15냥이었다. 16냥이 1근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고려 조정은 은병 주조를 통해 1냥당 약 3냥 반의 재정적 수입을 얻은 것으로 생각된다. 제도 시행 이후 은병은 다양한 화폐적 기능을 수행하였다. 국가에서 개인에 대한 사여의 주요 물품이 되거나, 각종 재정 수입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또한 집을 사고팔 때 은병이 사용되는 등 교환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특히 송의 사신 서긍(徐兢) 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즉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고려인들은 시장에서 은병과 포(布)로 물건을 사고팔며, 잔액은 쌀(米)로 계산하였다고 한다. 이는 당시 은병이 화폐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중요한 점은 사료에서 물가를 표현하는 방식이 은병 유통 이후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기존에는 곡물과 포(布)의 교환 비율로 산정되는 물가가 은병과 쌀(米) 혹은 포(布)의 교환 비율로 계산되었다. 이는 고려시대 물가와 화폐 유통의 기준이 은병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은병 한 개의 교환 가치는 일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당시의 물가 변화가 반영된 때문이었는데, 1132년(인종 10)에는 은병 1사(事)에 쌀 5석이었으나, 충렬왕 연간에는 적게는 15~19석, 많게는 50석까지 등귀한 적도 있었다. 공민왕 대 이후에는 물가를 표시할 때 더 이상 은병이 기준이 되지 않았는데, 이는 원 간섭기 은의 유출로 은병 제도가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변천사항
이후 동전은 『고려도경』에 기록된 것처럼 약을 사고파는 곳 등 일부에서만 유통되는데 그쳤지만, 은병은 고액권 역할을 하며 지속적으로 유통되었다. 하지만 원 간섭기에는 원의 지폐인 보초(寶鈔)가 유입되어 유통되었고, 은은 지속적으로 유출되며 은가가 등귀하게 되었다. 이에 충혜왕은 1331년(충혜왕 1) 4월에 소은병(小銀甁)을 제작하였는데, 교환 가치는 1개에 오종포(五綜布) 15필에 해당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은병은 사용을 금지하여 소은병만 유통하게 하였다. 이렇게 소은병을 만들어 유통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은의 유출로 은병의 가치가 너무 오른 때문으로 보인다.
고려 말인 공민왕 대에 이르면 은병 제도가 완전히 무너졌다. 공민왕 대에는 새로운 화폐 제도인 은전(銀錢)의 발행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며, 공양왕 대에는 지폐인 저화(楮貨) 발행이 시도되기도 했다. 또한 이 당시 물가 표현에서도 은병 대신 포(布)와 쌀(米)의 교환 가치로 표현되는 등 은병의 역할을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된다.
의의 및 평가
참고문헌
원전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 『계림유사(鷄林類事)』
논문
- 김도연, 「고려시대 은화유통에 관한 일연구」(『한국사학보』 10, 고려사학회, 2001)
- 김도연, 「고려시대 화폐정책의 변화와 물가산정 방식」(『사총』 90,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17)
- 김도연, 『고려시대 화폐유통 연구』(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8)
- 이경록, 「고려전기 은폐제도의 성립과 그 성격」(『한국사의 구조와 전개-하현강교수정년기념논총-』, 논총간행위원회, 2000)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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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금속으로 만든 화폐. 소재의 가치가 통용 가치와 같은 본위 화폐인 금화와 은화가 있고, 소재의 가치가 통용 가치보다 낮은 보조 화폐인 니켈화, 알루미늄화, 백통화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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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고려 시대의 승려(1055~1101). 이름은 후(煦). 자는 의천(義天). 중국 송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천태종을 열었으며,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세우고 ≪속장경≫ 4,000여 권을 간행하였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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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고려 시대에, 주전도감에 속하여 돈을 주조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아치.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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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 예전에, 중량을 재서 그 교환 가치를 헤아려 쓰던 화폐. 중국의 말굽은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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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 고려 시대에, ‘은병’을 달리 이르던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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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
: 나라나 관청에서 금품을 내려 줌.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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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
: 중국 송나라 때의 문신(?~?). 고려 인종 1년(1123)에 고려에 사신으로 다녀간 후 ≪고려도경≫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알렸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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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8
: 물건값이 뛰어오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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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9
: 종묘의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사당으로, 초에는 목조, 익조, 탁조, 환조 등 태조의 사대조(四代祖) 신위를 모셨으나 그 후에는 당시 재위하던 왕의 사대조(四代祖)와 조선 시대 역대 왕 가운데 공덕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19칸으로, 단일 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 우리나라 국보로, 국보 정식 명칭은 ‘종묘 정전’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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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0
: 고려 충혜왕 원년(1331)에 만든 은화. 오종포(吾綜布) 15필의 가치를 가졌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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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1
: 은으로 만든 돈.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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