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숙태후(思肅太后)의 본관은 경원(慶源)이며, 아버지는 이자연(李子淵)의 3남인 공부상서(工部尙書) 이석(李碩)이다. 문종 치세 후반기에 문종의 차남인 국원공(國原公)과 혼인하였다. 국원공이 순종의 급사(急死)로 왕위에 오르니 그녀는 왕비로 책봉되고 연화궁비(延和宮妃)로 불리었다. 1084년(선종 1) 6월에 아들(헌종)을 낳았으며, 이 외 두 명의 딸이 더 있다. 첫째 딸은 일찍 사망했으며, 둘째 딸은 수안택주(遂安宅主)인데, 맹인으로 태어나 혼인하지 않았으며 1128년(인종 6)에 사망하였다. 1094년에 헌종은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였고, 그해 6월 1일에 그녀를 왕태후(王太后)로 책봉하였다. 그녀가 거처하던 궁전을 중화(中和)로 부르고, 부를 두어 영녕(永寧)이라 하였다. 헌종은 재위한 지 1년 5개월 만에 숙부인 숙종에게 선위하였다. 그녀는 헌종과 함께 남편이 국원공 시절에 거처했던 흥성궁(興盛宮)으로 돌아가 일생을 마쳤다. 헌종 사후 중화전과 영녕부는 폐지되었다.
국원공의 아내였던 시기의 사숙태후의 활동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예종대에 선종묘(宣宗廟)에 첫째 후비인 정신현비(貞信賢妃)를 합사하는 문제가 거론되었을 때 간관이 “정신현비는 국원공의 비(妃)로 있은 기간이 오래지 않았고, 태후는 국원공의 비빈으로서 왕비가 될 때까지 내조한 공이 많습니다. 그리고 아들인 헌종이 왕위를 계승하고 이후 퇴거할 때까지 그 덕을 잃은 것이 없으니 태후를 합사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는 것에서 사숙태후가 문원공의 배우자로서 일정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들 헌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그녀가 3년간 섭정하였다. 이를 『고려사』에는 ‘임조칭제(臨朝稱制)’라고 언급하고 있다. ‘임조칭제’는 유약한 황제를 대신하여 태후가 왕권을 행사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본다면 사숙태후는 섭정할 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시호를 사숙태후라고 하였다. 1107년(예종 2) 사숙태후를 선종묘에 배향하였다. 1140년(인종 18) 4월에는 정화(貞和)라는 시호를, 1253년(고종 40) 10월에는 광숙(匡肅)이라는 시호를 추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