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년(목종 3) 10월에 목종의 원찰(願刹)로 창건되었다. 얼마 뒤 목종의 모후(母后) 천추태후(千秋太后)는 헌정왕후(獻貞王后)의 소생인 대량군(大良君)순(詢)을 미워하여 강제로 삭발시켜 이 절로 내쫓은 사건이 벌어졌다.
그날 밤 사승(寺僧)들은 큰 별이 절 마당에 떨어져 용으로 변했다가 다시 사람이 되는 꿈을 꾸었다. 이상하게 생각하던 중 대량군이 삭발하고 숭교사를 찾아왔으므로 승려들은 지성으로 그를 모셨는데, 뒷날 그는 다시 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옮겼다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가 목종의 다음 임금인 현종이다.
1180년(명종 10) 6월명종은 이 절에 법화회(法華會)를 개설하였고, 1217년(고종 4) 3월에는 현화사(玄化寺)에 있던 현종의 아버지 안종(安宗)을 비롯, 현종·강종(康宗)의 신어(神御)를 옮겨 봉안하였으며, 그 해 8월에는 강종의 신어만을 왕륜사(王輪寺)로 다시 옮겼다. 1334년(충숙왕 복위 3) 6월에는 충숙왕이 이 절에 와서 학선(翯仙)에게 장생(長生)의 비결을 물었는데, 학선은 사람에게 일정한 분수가 있고 그것을 지나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대답하였다.
왕이 총애하던 술사(術師)와 서운관의 관리들은 이곳에 절이 있으면 반드시 역신(逆臣)이 생기게 마련이므로 철거하는 것이 좋다고 권하였으나, 충숙왕은 목종이 창건한 이래 역신이 없었음을 말하며 이를 묵살하였고, 1335년에는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현재 사지의 위치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고려도경』에 의해 용수산(龍岫山) 남쪽 기슭의 양릉리(陽陵里)로 넘어가는 외성(外城) 마루턱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