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노경 ()

김노경 친필
김노경 친필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광주부유수, 지돈녕부사,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가일(可一)
유당(酉堂)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66년(영조 42)
사망 연도
1837년(헌종 3)
본관
경주(慶州)
주요 관직
판의금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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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광주부유수, 지돈녕부사,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가일(可一), 호는 유당(酉堂). 영의정 김흥경(金興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고, 아버지는 판서 김이주(金頤柱)이며, 어머니는 윤득화(尹得和)의 딸이다. 아들이 김정희(金正喜)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01년(순조 1) 선공부정(繕工副正)을 지내고, 1805년 현감으로서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을 거쳐 승지·이조참판 및 경상도와 평안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또, 1819년 예조판서를 비롯하여 이조·공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그 뒤 대사헌을 거쳐 1827년 판의금부사·광주부유수·지돈녕부사 등의 요직을 거치고, 사행(使行)으로서 1809년 동지 겸 사은부사로, 1822년에는 동지사로 연경에 다녀왔다.

그러나 익종이 대리청정을 할 때 김로(金鏴)·홍기섭(洪起燮) 등과 같이 중직에 있으면서 전권을 행사하고, 이조원(李肇源)의 옥사를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1830년 지돈녕부사 재직 중 삼사와 의정부의 탄핵을 받아, 강진현의 고금도(古今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833년에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를 지낸 뒤 1837년에 졸하였다.

사후인 1840년에 김홍근(金弘根)이 윤상도(尹尙度)의 옥사를 재론하여 관작이 추탈되었다. 1857년(철종 8)에 시원임대신(時原任大臣)의 연차(聯箚)로 신원되고 관작이 복구되었다. 글씨를 잘 써 아들인 김정희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신의왕후탄강구묘비(神懿王后誕降舊墓碑)」 등의 글씨가 전한다.

참고문헌

『순조실록(純祖實錄)』
『헌종실록(憲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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