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언(尙彦. 1707~1791)은 조선 후기 편양파(鞭羊派) 승려로 『화엄청량소은과(華嚴淸凉疏隱科)』, 『구현기(鉤玄記)』 등을 저술한 화엄학자이다. 선운사(禪雲寺)에서 출가했고, 호암 체정(虎巖體淨)의 편양파 주류 법맥을 이었으며, 함양 영원사(靈源寺)에서 입적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화엄 강학과 연구에 평생을 전념했으며, 연담 유일(蓮潭有一), 인악 의첨(仁岳義沾), 백파 긍선(白坡亘璇) 등에게 화엄을 가르쳤다. 가흥대장경 복각본인 징관(澄觀)의 『화엄경소초』 판목을 교감하고 판각한 후 지리산 영각사(靈覺寺)에 보관하였다.
상언(尙彦. 1707~1791)은 본관은 전주 이씨(全州李氏), 법호는 설파(雪坡), 법명은 상언(尙彦)이다.
상언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19세에 선운사(禪雲寺)의 희섬(希暹)에게 출가하였다. 호암 체정(虎巖體淨, 1687∼1748)으로부터 편양파(鞭羊派)의 법맥을 이었다. 편양 언기(鞭羊彦機)로부터 시작하여 풍담 의심楓潭義諶)-월담 설제(月潭雪霽)-환성 지안(喚醒志安)-호암 체정으로 이어진 편양파 주류 계보에 속한다. 한편, 부휴계의 교학 종장 회암 정혜(晦庵定慧, 1685∼1741)에게도 배웠다.
1739년 용추사(龍湫寺)에서 화엄 강의를 시작했는데, 당시 이미 삼승오교(三乘五敎)를 두루 통달했다고 한다. 이후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등지에서 화엄학을 깊이 연구하고 강의에 매진하였다. 교학자로 이름난 호남의 연담 유일(蓮潭有一, 1720∼1799)과 영남의 인악 의첨(仁岳義沾, 1746∼1796) 그리고 선종 우위론을 내세운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 등이 그에게서 화엄학을 배웠다.
1770년(영조 46) 낙안 징광사(澄光寺)에 화재가 나서 백암 성총(栢庵性聰, 1631∼1700)이 간행한 징관(澄觀, 738~839)의 『화엄경소초(華嚴經疏鈔)』의 가흥대장경 복각본 판목이 불에 타자, 1775년에 이를 교감(校勘) · 판각하고 지리산 영각사(靈覺寺)에 경판각을 세워 보관하였다.
그는 당대 화엄교학의 대가로 명성을 떨쳤고, 그의 저술은 이후 강학의 지침이 되었다. 채제공(蔡濟恭)이 쓴 비문에는 ‘화엄의 충신(忠臣)’으로 기록되어 있다. 말년에는 10여 년 동안 매일 염불에 전념했고, 1791년 1월 3일 함양 영원사(靈源寺)에서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세수 85세, 법랍 66세였다. 다비 후 출가 사찰인 선운사(禪雲寺)와 입적지인 영원사(靈源寺)에 탑이 세워졌다.
설파 상언은 평생 『화엄경』을 25회나 강설했고, 징관의 『화엄경소』의 분명하지 않은 부분을 해인사(海印寺)의 대장경과 비교하여 오타와 오류를 정정한 『구현기』 1권과 『화엄은과』를 펴냈다. 『화엄경』 「십지품(十地品)」에 대한 주석서도 남겼는데, 그의 강의를 들은 승려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이 책의 발문에는 “『화엄경』은 근기에 따른 수기(隨機)의 설이 아니며 본성에 부합하는 칭성(稱性)의 지극한 설로서 여러 경전 중에서 가장 뛰어난 근본 경전이다. 「십지품」은 더욱 깊이가 있는데, 이 사기를 쓴 설파 장로는 당대의 화엄 종주로서 근원을 밝히고 의망(疑網)을 풀어 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에게 화엄학을 배운 연담 유일은 "화엄의 무너진 강령을 정비하여 십현(十玄)의 법문을 폈으니 이는 징관이 다시 온 것"이라고 기술하였고, 그의 『화엄소초』 주석이야말로 ‘조선 화엄과(華嚴科)의 금과옥조’라고 하며 화엄종주(華嚴宗主)로서 상언의 위상을 높이 평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