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해인사 일주문 앞 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이중기단에 삼층탑신을 지닌 통일신라 양식이지만 기단부에서 생략과 변형이 두드러진 석탑이다. 1966년 도굴당한 이 석탑의 탑지와 소탑 등이 압수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도굴되었다가 압수된 이 탑의 물품은 벽돌에 음각된 탑지(塔誌) 4매와 소탑 157기이다. 탑지는 신라 후기 문장가인 최치원이 지은 것으로 유명한데, 해인사묘길상탑지(海印寺妙吉祥塔誌), 운양대길상탑지(雲陽臺吉祥塔誌), 백성산사(百城山寺), 오대산사길상탑지(五臺山寺吉祥塔誌)로 원래 따로 봉안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탑지에 따르면, 신라 진성왕대에 혼란한 상황에서 도적들에게 목숨을 빼앗긴 56명의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진성여왕 8년(895) 탑을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탑지에 기록된 무구정소탑 99기와 77기의 봉납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 조탑경으로 유행했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따른 조탑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석탑은 우선 입지적인 면에서 사찰의 중심지가 아닌 입구에 일주문 밖 도로변에 위치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석탑은 이중기단에 삼층의 탑신을 지닌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부의 생략과 변형이 두드러진다. 넓은 장대석으로 지대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하층기단을 형성하였다. 하층기단 면석은 지대석, 면석, 갑석을 모두 1매의 통돌로 제작되었고 모서리에 우주를 두고 면석 중앙부에 1주의 탱주를 두었다. 상면 갑석 중앙에 얕게 괴임을 새기고 상층기단을 받치고 있다. 상층기단 역시 하층기단과 같은 1매의 통돌로 제작되었는데 중앙에 1주의 탱주를 새겼다. 이처럼 하층기단과 상층기단을 1매의 돌로 제작한 예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전체적으로 상층기단의 높이가 낮아 기단부가 빈약한 느낌이 든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1매로 총 6매로 구성되었다. 1층 몸돌을 제외한 2층과 3층의 높이는 급격히 낮고 옥개석의 옥개받침은 5단으로 통일성을 보이고 있다. 옥개석의 처마는 네 모서리에서 경쾌하게 반전하며 옥개석 하단에는 물끊기 홈이 남아 있다. 상륜은 노반을 제외하고 모두 결실되었으나 최근 노반 위로 보주형 석재를 새로 만들어 올려놓았다.
이 탑은 사망한 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한 위령탑이다. 이로 인하여 일반적으로 불전 앞에 건립되는 불탑과는 달리 일주문 밖 길가에 위치하게 되었다. 탑지의 기록에 따르면, 이 탑의 높이에 대하여 일장삼척(一丈三尺)이라고 하였는데, 실제 석탑의 높이가 약 3m인 점을 감안한다면 탑의 건립에 당척(唐尺)이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외형적으로 봤을 때 기단부를 상하층 각각 1매의 돌로 조성한 예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다. 이는 당시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임을 감안하여 탑의 크기와 점유 면적을 줄이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 석탑은 기존의 신라 석탑에 비하면 조형성에서 많은 쇠퇴를 보이고 있으나 탑지에 의해 제작연대가 확실한 탑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탑의 건립에 있어서는 통일신라시기에 유행하였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의한 추복탑(追福塔)이 신라 말기까지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탑지에 따르면, 장사(匠士) 승려 난교(蘭交), 청유(淸裕)와 부장사(副匠士) 거불(居弗), 견상(堅相), 구조(具祖) 등 총 5인의 장인을 특별히 초청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신라의 수공업 체계에서 승려 장인의 직능이 세분화되어 있었고 여러 곳의 불사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석탑을 통하여 탑의 건립에 필요한 경비와 물품 등을 알 수 있어 당시 사원경제를 파악하는데 결정적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건탑 이유와 건립 과정을 통해 신라말기 사회의 혼란상과 경제사, 도량형 등을 밝히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는 탑으로 평가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