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 ( · )

경주 원원사지 동ㆍ서 삼층석탑 남서면
경주 원원사지 동ㆍ서 삼층석탑 남서면
건축
유적
문화재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봉서산 원원사터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조성된 2기의 석조 불탑. 보물.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봉서산 원원사터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시기에 조성된 2기의 석조 불탑. 보물.
개설

200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석탑은 경주에서 울산으로 나가는 교통로인 외동읍 모화리 봉서산 동쪽 기슭에 있다. 사역에는 동서로 삼층석탑이 있고, 탑 가운데 화사석이 결실된 석등이 남아 있다. 삼층석탑은 동서탑 모두가 이중기단에 삼층의 탑신을 가진 전형적인 신라 석탑 양식이며 크기나 표면의 부조수법이 거의 동일하여 함께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변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따르면, 원원사(遠願寺)는 신인종(神印宗: 밀교의 종파)을 신라에 들여온 명랑(明朗)의 후계자인 안혜(安惠), 낭융(朗融) 등과 김유신(金庾信), 김의원(金義元), 김술종(金述宗) 등 당시 주요한 인물들이 힘을 모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세운 호국사찰이다.

삼층석탑은 사찰의 창건과 멀지 않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의 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인조 8년(1630)에 중수되었고, 효종 7년(1656)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다고 한다. 또한 18세기 후반 불국사 중창에 원원사 스님이 참여한 기록이 있어 1700년대까지는 법등이 이어졌다고 보인다.

속전에는 1809년 일반인이 무덤으로 쓰기 위하여 동서탑을 무너뜨려 탑재들을 폐기하였다고 한다. 그 뒤로 쌍탑은 오랜기간 방치되다가 1930년 교토데이코쿠대학[京都帝國大學]의 노세 우시조오[能勢丑三]가 조선총독부에 건의하여 1931년 가을 경주고적보존회에서 복원했다.

내용

탑은 금당지 앞에 동서로 나란히 서 있다. 파손 복원에 따른 외형적 차이가 존재할 뿐 쌍탑은 같은 형식으로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단은 이중기단으로 지대석의 외곽은 장대석을 돌려 탑구(塔區)처럼 구획지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복원하면서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층기단 하부에도 장대석을 깔고 그 위에 기단부를 형성하였는데, 하대저석과 면석이 한 돌로 되어 있다. 면석은 ‘ㄱ’자형 귀틀석을 네 모서리에 두고 좌우측에 탱주가 새겨진 ‘ㅡ’자형 면석을 4면에 끼워 넣어 총 8매의 석재로 결구하고 있다. 하층갑석도 면석과 같은 8매로 되어 있다. 상층면석과 연결되는 부위의 중대받침은 호 · 각형의 2단 몰딩이 있다.

상층기단면석은 ‘ㄱ’자형 귀틀석을 네 모서리에 두고 ‘ㅡ’자형을 4면에 끼워 넣어 총 8매의 석재로 결구하고 있다. 각 면 중앙에 끼워 넣은 면석은 쌍탑 모두 좌우측에 탱주가 새겨져 통일성을 보인다. 상층기단 면석에는 각 면에 3구씩 평복을 입고 손을 다소곳한 자세로 모은 십이지상을 새겼다. 십이지상의 구성은 북면 중앙에 쥐상[子像]을 시작으로 시계방향으로 새겼으며 모두 향좌측을 바라보고 있으나 소상[丑像]만 반대방향인 향우측을 보고 있다. 이 가운데 동탑의 동면 향좌측상 1구, 서탑 남면의 향좌우측상 각 2구가 결실되었다. 상층기단 갑석은 크기가 비슷한 4매로 구성되었으며 갑석하단에는 1단의 부연이, 상단에는 2단의 각형 탑신받침이 있다.

탑신은 3층으로 각 층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1매로, 총 6매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석 중 초층탑신은 4면에 사천왕을 새겼으며 2층과 3층은 우주 옆으로 별도의 벽선을 그어 겹우주가 표현되었다. 사천왕상은 거의 반부조에 가까운 고부조로 각 면 모두 마멸과 훼손이 심한데, 동탑은 남방천왕이 일부 하체만 남아 있고, 서탑의 남방천왕은 완전히 멸실되었다. 옥개석은 양탑 모두 훼손상태가 심각한데, 모두 5단의 옥개받침과 상단에는 2단의 각형 탑신받침이 있다. 옥개석 처마 아래로는 물끊기 홈은 마련되지 않았으며 각 모서리마다 좌우로 1개씩의 풍경공이 있다.

상륜은 양탑 모두 노반과 앙화가 남아 있다. 앙화의 중앙에는 원통형의 찰주공이 남아 있다.

특징

원원사지 석탑은 동서탑 모두 같은 크기와 통일된 조형성을 보이고 있다. 석탑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2가지이다. 첫째, 기단부의 결구방식에 있어 상하층 모두 모서리에 ‘ㄱ’자형 돌로 결구하고 각 면 1매씩의 면석을 끼워 넣는 방식이다. 이 같은 구조는 상하층 탱주 2:2의 석탑에서 기단부의 구조를 가장 안정적으로 설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694년 건립된 전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시작되어 남산 남리사지 삼층석탑, 건천 용명리 석탑 등 8세기 경주에서 집중적으로 유행했던 방식이다.

둘째, 상층기단 각 면 3구씩 12지상과 초층탑신에 사천왕을 새긴 점이다. 신라 석탑에서 표면에 장엄, 외호적 요소로 부조상을 새기는 것은 8세기에 시작되어 9세기에 이르면 폭 넓게 유행하는데, 원원사 쌍탑은 조각수법이나 부조상의 조합으로 미루어 신라 석탑을 통틀어 가장 이른 시기의 부조 석탑으로 보인다.

동서 양탑 모두 부재의 숫자를 살펴보면, 기단부 28매, 탑신부 6매로 총 34매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를 구성하는 석재의 숫자는 물론 결구방식에 있어 균일성을 보인다. 기단부의 상 · 하층기단부의 탱주 숫자는 각각 2주씩이며, 탑신 모두 5단의 옥개받침을 유지하는 등 8세기 신라 석탑의 전형적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의의와 평가

원원사는 울산에서 경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왜구를 물리치기 위한 호국밀교(護國密敎)사찰로 건립되었다. 이를 뒷받침하듯이 탑의 상층기단에 각 면 3구씩 십이지상을 새기고 초층탑신에는 사천왕상을 새겨 넣었다. 사천왕과 12지신은 불교의 대표적 신장상으로 불법을 수호함과 동시에 나아가 불국토인 신라를 수호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원원사지 삼층석탑의 부조상은 신라 전형양식 석탑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부조상일 뿐만 아니라 조각수법도 뛰어나다. 또한 상하층기단 네 모서리에 ‘ㄱ’자형 귀틀석을 두고 각면 1매씩의 부재를 끼워 넣는 정형화된 구조방식과 탑신부의 돌다듬기 수법 등은 8세기 신라 석조미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한편 상층기단과 초층탑신에 새겨진 십이지상과 사천왕상의 조합은 현재까지 확인되는 유일의 석탑이라는 점에서 불교조각사 및 도상해석학 연구에 귀중한 가치를 지니는 석탑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경상북도의 석탑 Ⅲ』(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탑』(강우방·신용철, 솔출판사, 2003)
『경주원원사지 동서삼층석탑 수리보고서』(경주시, 2002)
『토함산지역 불교유적 조사연구』(경주대 경주문화연구소, 2000)
『고유섭전집』(고유섭, 통문관, 1993)
『한의 건축문화』(등도해치랑, 이광로 역, 기문당, 1986)
『한국탑파연구자료』(김희경, 고고미술동인회, 1968)
「통일신라 이중기단 석탑의 형식과 편년」(신용철, 『동악미술사학』9, 동악미술사학회, 2008)
「신라사천왕상의 연구」(문명대, 『불교미술』5, 동국대학교박물관, 1980)
「사천왕사지출토 채유사천왕부조상의 복원적 고찰」(강우방, 『미술자료』25, 국립중앙박물관, 1979)
『朝鮮建築史論』(藤島亥治郞, 1930)
집필자
신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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