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학(華嚴學)의 학승(學僧)으로서 북악(北岳)을 대표한다. 신라의 화엄학은 의상(義湘)을 그 효시로 하는데, 말기에는 남악과 북악으로 나누어졌다. 그 두 학파의 창시자는 관혜(觀惠)와 희랑이다.
희랑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복전(福田 : 歸依를 받았다는 뜻)이 되었고, 관혜는 후백제 견훤(甄萱)의 복전이 되었다. 관혜와 그 문도들은 남악 화엄사(華嚴寺)를 근거로 활동하였으며, 희랑과 그 문도들은 북악 부석사(浮石寺)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두 파의 쟁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고, 다만 그 분파가 매우 심각하였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고려 때 균여(均如)는 그 조화를 모색한 인물이었다. 『균여전』에는 “이 두 사람은 신심(信心)을 받아 향화(香火)를 올리며 서원(誓願)을 맺었으나 서원이 이미 달라졌으니 어찌 주장이 같을 수 있으랴! 문도들에게 내려가면서 점차 물과 불처럼 되었다.
더구나 법(法)의 맛을 각기 다르게 받았으니 그 폐단을 없애기가 어렵게 된 지 이미 오래였다. 스님(균여)은 언제나 남악과 북악의 종문(宗門)은 취지가 서로 모순되어 구분되지 않음을 탄식하여 많은 갈래를 막아 하나에로 귀환(歸還)되기를 희망하였다.”라고 하였다.
즉, 신라 말기에 이르러 화엄학은 부석사와 화엄사의 두 파로 나누어졌으며, 서로 정통임을 주장하는 폐해가 노골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해인사의 희랑대(希朗臺)는 희랑이 머무르면서 수도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