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은 고려 고종 때 대장도감에서 판각한 대장경판이다.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가 소장하고 있다. 몽골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에서 대장경판을 새기게 되었다. 판각의 매수가 8만여 판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수록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1237년 판각을 시작하여 1248년에 대장 목록을 마지막으로 새겼다. 대장경 가운데 내용이 가장 정확하고 완벽한 대장경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1962년에 국보, 1995년 세계문화유산,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되었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해인사 장경판전이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해인사 고려대장경판과 제(諸)경판이 200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현재 해인사(海印寺)에 소장되어 있는 이 대장경 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판’이라고 하며, 판수(板數)가 8만여 판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煩惱)에 대치하는 8만 4천 법문(法門)을 수록하였기 때문에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이라고도 한다.
이보다 앞서서 고려 현종 때 새긴 판을 ‘초조대장경판’이라 하는데, 이것은 고려 고종 때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 버려 다시 새겼기 때문에 ‘재조대장경판(再雕大藏經板)’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해인사에 있고 고려시대에 새긴 대장경판이라 하여 ‘해인사고려대장경판(海印寺高麗大藏經板)’이라고 한다.
또한 당시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새긴 것이기 때문에 ‘고려대장도감판(高麗大藏都監板)’이라고도 한다. 이 때 최우의 참여가 큰 힘이 되었고 개태사(開泰寺)의 승통(僧統)인 수기(守其)가 내용교정을 맡아 북송 관판과 거란본 및 우리나라 초조대장경을 널리 대교(對校)하여 오류를 바로 잡아 판각하였다.
대장경판을 새길 때의 배경은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잘 나타나 있다. 즉, 몽골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에서 대장경판 판각을 부처님에게 고하고 있다.
1237년(고종 24)에 쓴 이 기고문에 대장경 판각을 위하여 이미 담당관사를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1237년에는 판각을 시작하여 첫해에 판각된 것이 2종 115권이었고, 1248년(고종 35)에 대장목록을 마지막으로 새겼음이 간행기록 조사에서 밝혀졌다.
이 대장경판은 1237~1248년까지 12년 동안 남해에서 1,496종의 경전을 6,561권 7만 8,500여 장의 목판에 새긴 것으로,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천함(天函)에서 동함(洞函)까지 639개 함에 나누어 수록되어 있는데, 첫 번째 경(經)인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600권)은 천함에서 시작하여 한 개 함에 10권씩 묶어 60번째인 내함(柰函)까지 60개 함에 수록되어 있다.
이렇듯 한 개의 경도 분량이 많은 것은 여러 개 함으로 나누어 수록되어 있으나, 단권(單卷)의 경인 경우 여러 개의 경이 함께 한 개의 함에 수록되어 있다.
이들 함별 편성을 보면 첫 번째 대반야경의 경우처럼 10권씩 묶어 한 개 함을 이루고 있는가 하면, 79번째의 경은 12권씩 묶어 한 개 함을 이루고 있으며, 1255번째 『신집장경음의수함록』은 6권씩 묶어 한 개 함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상함(傷函: 함의 순서[函順]로 160번)의 경우 한 개 함에 경전 29개를 수록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 대장경판의 저본(底本)은 천함(天函: 경전 순서[經順]로 1번)에서 영함(英函: 경전 순서[經順]로 1087번)은 『개원석교목록(開元釋敎目錄)』에 수록된 경인데, 거란본에서 편입시킨 것 등 11개의 경전이 더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사함(社函: 經順 1088) 이후는 부분적으로 「속개원석교록」, 「속정원석교록」 등의 목록에 부분적으로 수록되어 있지만, 어떤 특정의 목록에 따라 편성한 것이 아니라, 간행 당시 수기 대사 등에 의해서 독자적으로 내용을 추가하여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대장경판의 재질은 산벗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돌배나무, 단풍나무 등 조각에 용이한 나무들이 사용되었다. 경판의 크기는 세로 24㎝, 가로 6878㎝, 두께 2.53㎝이고, 무게는 3㎏ 정도이다. 각 판의 상하(上下)에는 대부분 계선이 있는데 단변(單邊)으로 되어 있고, 경판의 가운데에는 판심이 없는 무판심(無版心)으로 두루마리 형식의 권자본(卷子本)의 판식(版式)을 지녔다.
경판은 양면 모두 경판의 보존을 위해 옻칠이 되어 있고, 경판의 양쪽에 마구리를 하고 있는데 경판과 잇는 네 귀퉁이에 금속판을 부착하였다. 양쪽 면에는 모두 경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 면에 23행 14자씩 새겨져 있지만, 경순(經順) 1255, 1403, 1496은 판심이 있고, 경순 1256은 행자수가 18행(소자는 36행)이며, 자수(字數)는 일정하지 않다. 그리고 1257은 22행 13∼15자(소자는 44행 17자)이고, 1258은 21행 13∼14자(소자는 42행 16자)이며, 1259는 22행 13자로 전부 소자(小字)이고, 1260은 25행 16자이다.
경순 1255의 녹함(祿函)에서 1261의 무함(茂函)까지는 일반 경전들과는 판식을 달리하고 있음이 특이하다. 그리고 각 권말에는 간행 기록(刊記)이 새겨져 있는데, 예외 없이 ‘고려국(분사)대장도감봉칙조조(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雕造)’라 되어 있다.
대장경의 판각 연도를 분석해보면, 연도별 판각 양이 모두 다르게 나타나 있다. 따라서 해마다 일정량의 판각계획에 의하여 판각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정장판각의 순서에 있어서도 뒤로 오면서 상당히 경순이 바뀌어 판각되었다.
또한 같은 경에 있어서도 권순 별로 판각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것도 판하본(板下本) 작성에서부터 초벌새김 · 재벌새김 · 마무리새김 등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이러한 작업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각수(刻手)의 능력 및 판각작업의 진행속도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이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2권 이상으로 구성된 경은 경별(經別)로 차례로 판각된 것이 아니라, 권별로 판각되었는데, 권별의 간기에 나타난 그 해에 판각된 것이다.
대장경 판각은 실제로 12년 동안 모두 마쳤지만, 『고려사』에 나오는 16년이라는 기간은 판각기간이 아니라,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대장경판을 새기기 위한 사전 준비 과정을 합친 기간으로 보인다.
대장경판을 새기기 위해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전담하도록 하였음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런데 경판을 새기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여 총괄한 것은 대장도감이고, 산지에서 나무를 베어 진을 빼고 판각할 수 있도록 적당한 크기로 잘라 다듬고 판하본 작성 등과 실제로 현장에서 판각한 것은 분사대장도감에서 했던 것이다.
그리고 1248년(고종 35)은 실제의 정장 판각을 모두 마치고 마지막으로 『대장목록』 1종만을 판각한 해이고, 대장경판을 판각하고 난 뒤의 뒷마무리 작업은 권별 판각을 완료한 뒤 바로 뒤따라 처리하여 판가(板架)에 순서대로 진열하였을 것이므로, 간기에 나타난 1248년을 대장경판 판각작업의 완료 연도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판각완료 연도인 1248년을 하한연도로 볼 수 있으며, 일의 시작은 적어도 1233년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 대장경판은 대장도감에서 판각한 판만이 아니라,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한 판이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한 경은 모두 72종 504권에 이르고 있다. 판각연도는 1243년(계묘)에서 1247년(정미)까지 5년간 판각한 것이다.
이 분사대장도감이 무슨 목적으로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적어도 직접 판각을 시작한 연도는 1243년(고종 30)이며, 또한 504권의 분사판(分司板) 가운데 473권의 경은 1243∼1244년의 2년 동안 판각되어, 결국 분사도감에서의 판각이 이 시기에 가장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정도의 판각량으로 분사대장도감이 판각기능 면에서만 설치되지는 않았을 것이며, 통나무를 잘라 각수가 판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연판(鍊板) 작업 및 판하본(板下本) 작업까지의 업무를 담당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분사대장도감에서 판하본 작업과 연판 작업 등 판각을 위한 준비기능을 가지고 대장도감의 일익을 담당하였다면, 적어도 1242년(고종 29)까지 이들 준비작업을 완료하고, 1243년부터 판각기능으로 돌려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한 간기가 보이는 경들도 모두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된 것만이 아니라, 권별로 대장도감에서 판각된 것과 섞여 있는 점에서 보면,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이 동일한 장소였던 것이다.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된 72종의 경판 가운데 전체가 분사판인 것은 43종이고, 나머지 간기가 없는 경우 8종을 제외한 21종은 대장도감과 섞여 판각된 것이었다. 여기서 보면 대장도감이나 분사대장도감은 멀리 떨어진 장소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동일한 경전을 그것도 서로 권수를 섞어가면서 판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같은 경전의 경판에 새겨진 각수를 통해 면밀히 검토해본 결과 분사대장도감이나 대장도감은 같은 장소임이 분명하였다. 그리고 그 장소는 남해군으로 파악되었다.
그동안 대장도감은 강화 선원사에 설치되었고, 선원사에서 대장경판을 판각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리고 선원사는 당시 최고 권력자인 최우의 원찰(願刹)로 1245년(고종 32)에 완공되었는데, 이때 대장경판은 이미 90%이상 판각을 완료하였으므로 대장경판각과 관계가 없었다.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태조 7년 5월 병진의 ‘강화 선원사에서 옮겨온……’이라는 기사)을 잘못 이해하여 생긴 오류였다.
『고려사』[지(志)권 제32, 식화(食貨)1, 후원년 3월조(後元年 3月條)]에도 ‘백미 삼백석을 대장도감과 선원사에 나누어 주라’는 기록이 있어 대장도감이 선원사와는 관계가 없는 것을 알 수 있고, 대장경은 경상남도 남해에서 판각한 것이 분명하다.
이 대장경 판각은 이를 인출(印出)하여 널리 유포시키고자 함이 목적이었으므로 판각을 완료하고 난 뒤 인출(印出) 사업이 바로 잇달아 있었다. 『고려사』에는 고종이 1251년 9월 성의 서문 밖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에 행차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대장경판을 새기고 난 뒤 처음으로 전질(全帙)을 인출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뒤 고려 말의 명신인 이색(李穡)이 아버지의 유지(遺旨)를 받아 1381년에 인출하여 신륵사에 새로 세운 장경각에 봉안한 일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1393년(태조 2) 왕명으로 인경(印經)하여 연복사(演福寺) 5층탑에 봉안하였고, 1458년(세조 4) 왕이 신미(信眉) 등에게 명하여 50부를 인출하게 하여 전국의 큰 사찰에 봉안하였고, 1500년(연산군 6)에도 인출되었다.
1865년(고종 2) 2부를 인출하여 월정사와 설악산 신흥사에 각각 한 부씩 봉안하였고, 1898년에도 인출하였으며, 1899년 상궁 최씨(崔氏)의 발원으로 4부를 인출하여 해인사 · 통도사 · 송광사 등 삼보사찰에 한 부씩 봉안하고, 나머지 한 부는 13도의 각 사찰에 골고루 나누어 봉안하였다. 이러한 인출은 소요되는 인력과 물적 자원이 적지 않으므로 국가의 힘이 아니고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 밖에도 해인사대장경은 승려들의 불교연구를 위하여, 또 경전신앙[經信仰]의 차원에서, 그리고 일본에서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도 상당수가 인출되었다.
조선 초기의 일본과의 교류는 고려대장경 교류라 할 정도로 일본은 끊임없이 요구하여 가져갔던 것이다. 당시 조정은 왜구의 창궐로 인해 골치를 앓고 있었는데, 왜구에 잡혀갔던 포로와 대장경을 서로 교환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현재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인출한 대장경의 고판본(古版本)은 거의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1915년 당시 총독이던 데라우치(寺內正毅)가 경도(京都) 센유지(泉涌寺)에 봉안하고자 인출한 일이 있었다. 이것은 그 뒤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도서관에 기증되었으나, 1923년 동경대지진 때 불에 타버렸다. 이때 인출된 또 한 부는 지금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뒤 1935년에는 만주국 황제를 위하여 조선총독부에서 인출하여 선물로 보낸 일이 있는데, 만주국 붕괴와 더불어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같은 해 동국대학교 전신이던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에 비치하고자 한 부를 인출하였는데, 현재 동국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 뒤 동국대학교에서는 해인사 대장경판의 보존과 보급을 위하여 1953년에 시작하여 1976년까지 영인 축소판을 간행하였다. 모두 48권(목록 1권 포함)으로, 고려대장경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여 세계 각 국의 유명도서관에 보냈다.
이 대장경판은 초조대장경인 북송(北宋)의 관판대장경(官板大藏經)과 거란판대장경(契丹板大藏經)의 내용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장경 가운데 내용이 가장 정확하고 완벽한 대장경이라는 데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