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언(煕彥, 1561~1647)은 법명이며, 호는 고한(孤閑)이다. 희언은 1561년(명종 16) 9월 함경북도 명천(明川)에서 태어났으며, 승려가 되기 전의 성은 이씨(李氏)이다. 어머니가 꿈에서 승려가 의발과 가사를 주는 태몽을 꾸고 희언을 가졌다고 한다.
희언은 17세에 명천 칠보산 운주사(雲住寺)에 들어가 출가하였고 18년 동안 경론(經論)을 공부하였다. 승려가 된 뒤로는 경(經)과 율(律)을 연구했으나 자신의 본분사를 밝히지 못해 경전을 버리고 사방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덕유산의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를 찾아가 '법성원융(法性圓融)'의 뜻을 묻고 그의 아래에서 3년 동안 학문을 닦았다.
희언은 언제나 누더기옷을 걸치고, 눈이 오는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으며, 머리가 길어도 개의치 않았고, 음식을 먹지 않고 10여 일씩이나 선정(禪定)에 들기도 하였다고 한다. 1622년(광해군 14)에 임금이 광주(廣州) 청계사(淸溪寺)에서 재를 베풀고 그를 증사(證師)로 삼아 금란가사(金欄袈裟)를 내렸으나, 희언은 재가 끝난 뒤 가사를 벗어놓고 몰래 도망하였다.
행장과 비문에 따르면, 하루는 희언이 서울로 올라와 돈의문(敦義門) 앞을 지나는데 10여 명의 불량한 아이들이 “너는 도승이냐 걸식승이냐.” 조롱하면서 모래를 파고 그를 묻었다. 우연히 지나가던 신자가 그를 구해 주었으나, 그는 조금도 성내지 않고 아이들을 향해 합장하며 '성불! 성불!'이라고만 하였다고 한다. 이를 본 아이들은 진짜 도승이라 감복하며 돌아갔다고 한다.
또, 희언은 사람들이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면 역시 합장을 하며 돌아가라고만 하였으며, 돌아가지 않을 때에는 몽둥이를 들어 사람들을 내쫓고 방문을 닫아 걸었다. 맛있는 음식을 주면 좋은 공양을 받을 만한 덕이 없다 하며 물리쳤고, 큰스님으로 떠받들면 존경받을 만한 행적이 없다며 거절하였다. 다만 간절하게 법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법성원융’의 뜻을 자세히 설명하여 주었다.
희언이 가장 가깝게 지냈던 승려는 부휴 선수의 제자로서 동문이었던 병자호란 때의 의승장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뜻이 맞았다. 각성은 1642년(인조 20) 왕명을 받아 서울로 가는 도중 길을 돌아 팔공산에 머물고 있던 희언을 방문하였다. 또 희언이 스승 선수가 머물렀던 가야산 해인사로 가서 수행할 때 각성이 다시 방문하여 함께 지내기도 하였다.
희언은 1646년(인조 24) 각성과 함께 속리산으로 자리를 옮겨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다음해인 1647년(인조 25) 11월 22일 나의 유해를 산속에 두어 짐승의 밥이 되게 하라는 유언과 함께 “공연히 세상에 와서 다만 지옥 찌꺼기만 남겼구나[空來世上特作地獄滓矣].”라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희언은 제자를 엄중히 가려 전법(傳法)하였기 때문에, 그 법을 이은 승려로는 각원(覺圓) · 영주(永周) · 종열(宗悅) 3명만이 있을 뿐이다. 그의 사리는 팔공산과 가야산에 나누어 탑을 세웠고, 이듬해 봄에는 속리산에도 탑을 세웠다. 현재 해인사 국일암 옆에는 부휴 선수, 고한 희언, 벽암 각성의 세 승탑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