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임진왜란 때부터 서울의 요새로 주목받은 곳이다. 1624년부터 1626년까지 후금(後金)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이곳에 남한치영을 만들었다. 이때 8도 도총섭 벽암 각성(1575~1660)의 주관 하에 많은 승군들이 동원되었고, 이후 성내 사찰에 승군이 상주하면서 수도의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다.
처음에 남한산성 안에는 9개의 사찰이 조성되었는데, 망월사(望月寺), 옥정사(玉井寺)는 원래 있던 절을 고쳐 지은 것이고, 개원사(開元寺), 한흥사(漢興寺), 국청사(國淸寺), 장경사(長慶寺), 천주사(天柱寺), 남단사(南壇寺), 동림사(東林寺) 7개 절은 새로 건축한 것이다. 남한산성 북쪽 방향에 4개, 남쪽에 5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북쪽은 장경사, 망월사, 동림사, 옥정사였고, 남쪽에는 개원사, 한흥사, 남단사, 천주사, 국청사가 자리잡았다. 이 중 개원사는 도총섭이 머물고 지휘하는 수사찰이자 치영의 중심이었고, 다른 승영(僧兵) 사찰에 무기와 화약이 비치되었다. 뒤에 영원사(靈源寺)가 추가로 세워지면서 남한산성 내에 모두 10개가 사찰이 들어오게 되었다. 1711년(숙종 37) 북한산성이 만들어지면서, 북한산성 내에도 승영과 11개의 진호(鎭護) 사찰이 설치되었다. 3년 뒤인 1714년에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의승군이 1년에 6차례 교대로 입역하는 의승방번제(義僧防番制)가 시행되었다.
『남북한의승방번변통절목(南北漢義僧防番變通節目)』에 의하면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 거주하던 승려의 숫자는 707명이었다. 남한산성에는 경기도 승려 14명, 충청도 28명, 강원도 14명, 황해도 4명, 전라도 136명, 경상도 승려 160명 등 총 356명의 승려가 상주했다. 1750년 균역법(均役法)이 시행된 후인 1756년(영조 32)에는 일반 양역(良役)에 비해 승역의 부담이 커져 의승방번제를 폐지하였다. 대신 각지 사찰에서 고용전을 거두어 산성에 상주하는 승군에게 지급하는 의승방번전제(義僧防番錢制)로 바뀌었다. 당시 의승의 번전은 약 7,040량이었다. 병조에서 걷어들인 방번전을 수어청에서 도총섭에게 분할로 지급했다. 1785년(정조 9)에 잡역과 공물에 대한 부담으로 방번전을 내는 데 어려움이 크고, 승역을 지는 승려의 수가 줄어들었다는 이유로 방번전을 절반으로 삭감했다. 1894년 갑오개혁 때에 이르러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의승군과 도총섭에 대한 관례적인 제도가 폐지되었다.
조선 후기 서울의 도성 방어를 맡은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치영은 당시 불교가 종교적 기능 외에도 국가적 역할을 담당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임진왜란 이후 불교계에서 승군 및 승역을 제도적으로 활용한 것은 불교가 존립하면서 내실을 다져갈 수 있었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