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치영 ()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전경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전경
불교
제도
조선 후기,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남한산성 안에 둔 의승군의 승영.
이칭
이칭
남한승영(南漢僧營)
제도/법령·제도
제정 시기
17세기
공포 시기
17세기
시행 시기
17-19세기
폐지 시기
1894년(고종 31)
시행처
수어청(守禦廳)
소장처
남한산성
주관 부서
수어청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남한치영(南漢緇營)은 조선 후기에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남한산성(南漢山城) 안에 둔 의승군(義僧軍)의 승영(僧營)이다. 인조 대에 벽암 각성(碧巖覺性)이 8도 도총섭(都摠攝)으로 임명되었고 산성을 조성하는 데 승군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승역(僧役)을 활용했다. 성 안에 수어청(守禦廳) 소속의 승영 사찰을 두었으며, 승군이 성을 방비하게 하였다.

정의
조선 후기,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남한산성 안에 둔 의승군의 승영.
설치 목적

남한산성임진왜란 때부터 서울의 요새로 주목받은 곳이다. 1624년부터 1626년까지 후금(後金)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이곳에 남한치영을 만들었다. 이때 8도 도총섭 벽암 각성(1575~1660)의 주관 하에 많은 승군들이 동원되었고, 이후 성내 사찰에 승군이 상주하면서 수도의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다.

기능과 역할

남한산성은 서울 주변의 중요한 요새로, 수어청의 관할 하에 있었다. 남한산성의 치영(緇營)에는 승군 138명이 상주하였고, 매년 경기, 강원, 황해와 삼남 지방의 승려 356명이 6차례씩 교대로 와서 산성의 방비를 맡았다. 총섭 1인, 중군(中軍) 1인이 승군을 통솔했으며, 교련관(敎鍊官) 1명, 초관(哨官) 3명, 기패관(旗牌官) 1명이 배치되었다.

변천사항

처음에 남한산성 안에는 9개의 사찰이 조성되었는데, 망월사(望月寺), 옥정사(玉井寺)는 원래 있던 절을 고쳐 지은 것이고, 개원사(開元寺), 한흥사(漢興寺), 국청사(國淸寺), 장경사(長慶寺), 천주사(天柱寺), 남단사(南壇寺), 동림사(東林寺) 7개 절은 새로 건축한 것이다. 남한산성 북쪽 방향에 4개, 남쪽에 5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북쪽은 장경사, 망월사, 동림사, 옥정사였고, 남쪽에는 개원사, 한흥사, 남단사, 천주사, 국청사가 자리잡았다. 이 중 개원사는 도총섭이 머물고 지휘하는 수사찰이자 치영의 중심이었고, 다른 승영(僧兵) 사찰에 무기와 화약이 비치되었다. 뒤에 영원사(靈源寺)가 추가로 세워지면서 남한산성 내에 모두 10개가 사찰이 들어오게 되었다. 1711년(숙종 37) 북한산성이 만들어지면서, 북한산성 내에도 승영과 11개의 진호(鎭護) 사찰이 설치되었다. 3년 뒤인 1714년에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의승군이 1년에 6차례 교대로 입역하는 의승방번제(義僧防番制)가 시행되었다.

『남북한의승방번변통절목(南北漢義僧防番變通節目)』에 의하면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 거주하던 승려의 숫자는 707명이었다. 남한산성에는 경기도 승려 14명, 충청도 28명, 강원도 14명, 황해도 4명, 전라도 136명, 경상도 승려 160명 등 총 356명의 승려가 상주했다. 1750년 균역법(均役法)이 시행된 후인 1756년(영조 32)에는 일반 양역(良役)에 비해 승역의 부담이 커져 의승방번제를 폐지하였다. 대신 각지 사찰에서 고용전을 거두어 산성에 상주하는 승군에게 지급하는 의승방번전제(義僧防番錢制)로 바뀌었다. 당시 의승의 번전은 약 7,040량이었다. 병조에서 걷어들인 방번전을 수어청에서 도총섭에게 분할로 지급했다. 1785년(정조 9)에 잡역과 공물에 대한 부담으로 방번전을 내는 데 어려움이 크고, 승역을 지는 승려의 수가 줄어들었다는 이유로 방번전을 절반으로 삭감했다. 1894년 갑오개혁 때에 이르러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의승군과 도총섭에 대한 관례적인 제도가 폐지되었다.

의의 및 평가

조선 후기 서울의 도성 방어를 맡은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치영은 당시 불교가 종교적 기능 외에도 국가적 역할을 담당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임진왜란 이후 불교계에서 승군 및 승역을 제도적으로 활용한 것은 불교가 존립하면서 내실을 다져갈 수 있었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남북한의승방번변통절목(南北漢義僧防番變通節目)』
『남한지(南漢志)』

단행본

이능화, 『조선불교통사』(신문관, 1918)

논문

김갑주, 「정조대 남북한산성 의승방번전의 반감」 (『소헌남도영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1984)
김용태, 「조선후기 남한산성의 조영과 승군의 활용」 (『한국 사상과 문화』 78, 2015)
우정상, 「남북한산성 의승방번전에 대하여」 (『불교학보』 1,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소, 1963)

인터넷 자료

기타 자료

관련 미디어 (1)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