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총섭은 중국 원나라 제도의 영향을 받아 고려 말에 처음 사용된 직책이다. 일례로 공민왕 때 왕사였던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은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이라고 칭해졌다. 조선 전기 선교양종 체제에서는 판사(判事)가 최고위 승직이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전국의 의승군을 통솔하기 위해 청허 휴정(15201604)을 8도 도총섭으로 임명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의승군을 이끄는 불교계 최고위 승직으로 8도 도총섭이라는 직책이 이어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서산대사 청허 휴정은 전국에서 5천 명의 의승군을 일으켰다. 이에 조정에서 휴정을 '8도 선교(禪敎) 16종 도총섭'으로 제수하였다. 처음에는 승장의 최고위직으로 '판사'라는 직명을 쓰려고 하였으나, 조선 전기 선교양종의 승정체제가 부활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어 고려 말에 쓰던 도총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8도 도총섭과 함께 각 도의 선과 교를 총괄하는 총섭을 2명씩 두었다. 당시 조정의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이자 군국기무를 관장한 비변사(備邊司)가 승직을 임명하는 인사 관리를 담당했다.
휴정에 이어 8도 도총섭을 지낸 사명 유정(四溟惟政, 1544~1610)은 비록 실질적인 직책은 아니었지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기도 했다. 도총섭과 총섭은 승병의 공을 평가하여 조정에 보고하였고, 승군 활동을 한 대가로 발급된 선과첩(禪科帖)을 승려들에게 나누어주는 실질적인 권한을 가졌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에 이르면, 의승군의 전통을 계승하는 승군과 승려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승역이 관례화되었다. 승역은 궁궐, 산성, 능묘, 제방 등을 조성할 때 동원되었으며, 점차 국역 체계 안에서 제도적으로 운용되었다. 승역을 진 승려에게는 도첩(度牒)이나 호패(號牌)가 발급되어 승려의 자격과 활동을 국가가 인정해주었다. 총섭제 또한 지속되어 주요 산성 및 사고(史庫) 등 승군이 배정된 곳에 총섭을 두었다. 예조가 승려의 인사 행정을 담당했다.
도총섭의 경우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을 쌓을 때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을 8도 도총섭으로 임명하여 승군을 동원하고 그 관리를 담당하게 하였다. 남한산성 안에는 개원사(開元寺) 등 산성을 방어하는 거점으로 활용된 9개의 사찰이 있었다. 1711년(숙종 37) 북한산성이 완성되면서 중흥사(重興寺)를 비롯해 승영(僧營) 사찰 11곳이 건립되었는데 계파 성능(桂坡聖能)이 북한산성 8도 도총섭을 맡아서 활약하였다.
정조 대에는 수원 용주사(龍珠寺)가 창건되고 8도 도승통(都僧統)을 중심으로 한 5규정소(糾正所) 체제가 가동되었으나 정조 사후에 이르러 유명무실해졌다. 19세기에 이르면, 교단을 통솔하는 기구나 승직의 권위는 약화된다. 총섭이라는 직책도 남발되어 큰 규모의 사찰에서 주지의 상급 또는 동급으로 임의로 사용되었다. 다만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의승군제와 8도 도총섭 직책은 그대로 유지되다가 갑오개혁(1894~1896) 때에 혁파된다.
고려 말 처음 사용되었던 도총섭이라는 직책은 임진왜란 때 의승군을 통솔하기 위해 다시 사용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의승군을 이끄는 최고위 승직으로 제도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