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2년(명종 12) 관선(官船)을 제작할 때 전주사록(全州司錄) 진대유(陳大有)와 상호장(上戶長) 이택민(李澤民)이 역사를 혹독하게 하니, 기두(旗頭) 죽동(竹同) 등 6명이 관노(官奴)와 불만자들을 모아 난을 일으켰다.
이 때 안찰사(按察使) 박유보가 고을에 들어가니 죽동 등이 진대유의 불법행위를 호소하였다. 이에 진대유를 압송하면서 이들을 진무하였으나 항복하지 않으므로 도내의 군병을 동원하여 토벌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반항이 굳세어 40여 일이나 되어도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며, 난은 대정(隊正)이 승도(僧徒)와 더불어 죽동 등 10여 명을 죽여 겨우 평정되었다. 이에 국가에서는 전주를 편안히 위무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군사를 조발한 죄목으로 파면하고 이장보(李章甫)를 대신 안찰사로 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