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1627년 정묘호란 당시 후금이 국경을 침범했을 때 팔도의승병대장을 역임한 승려.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626년(인조 4) 후금(後金)이 국경을 위협하자 조정에서는 팔도의승병대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관서지방에서 의승병 4,000명을 모집하여 평양에 주둔하면서 군대를 훈련시킨 뒤 안주(安州)에 진을 치고 있다가 이듬해에 적이 국경을 넘어 침입하자 이에 맞서 싸웠다.
그 뒤 묘향산에 머무르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관서지방 안찰사 민성휘(閔聖徽)의 부탁으로 의승병 대장이 되어 관서지방 관민을 동원하고 곡식을 수집하여 군량미를 충당하였다.
1637년 정월에 인조가 항복하여 청나라 군사가 물러간 뒤 조정에서는 그 공을 높이 사서 ‘가선대부 국일도대선사 부종수교 복국우세 비지쌍운 의승도대장 등계(嘉善大夫 國一都大禪師 扶宗樹敎 福國祐世 悲智雙運 義僧都大將 登階)’의 직호와 직첩을 제수하였으나, 국왕이 청나라에 항복한 것이 통분하여 직첩을 받지 않았다.
그 뒤 금강산·지리산 등을 순례하면서 여러 선원에서 한 철씩 참선을 하거나 불경을 강설하여 후학들을 지도했는데, 이르는 곳마다 수백 명의 참학자들이 모였다. 그 뒤 구월산 패엽사(貝葉寺)에 머물며 불경을 강의했으며, 만년에는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선방의 조실로 있으면서 참선 공부하는 학인들을 지도하였다.
1658년 불영대(佛影臺)에 토굴을 짓고 3년 동안 머무르다가, 하루는 묘향산 여러 암자를 둘러본 뒤 우물물을 마신 후 “나는 이제 가네.”라고 말한 다음 보현사에 와서 임종게를 남기고 나이 68세, 법랍 56세로 열반하였다.
제자들이 화장하여 사리 수십 매를 얻어서 보현사 서쪽에 부도를 세웠으며, 나머지 사리는 금강산·보개산·구월산과 해남 대둔사(大芚寺) 등 그와 인연이 깊었던 사찰에 부도를 세우고 안치하였다. 그는 선종과 교종에 두루 통한 고승이었으며, 특히 장자(莊子)의 사상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다.
법맥은 청허(淸虛) 휴정(休靜)-사명 유정-송월 응상-허백 명조로 이어지며, 그의 법맥을 이은 제자로는 의흠(義欽)·각흠(覺欽)·숭헌(崇憲)·쌍민(雙敏) 등 수십 명이 있다. 1662년(현종 3) 제자 삼인(三印)·설해(雪海) 등이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의 글을 받아 보현사에 있는 부도 옆에 비를 세웠다.
저서로는 1669년 제자 남인(南印)이 간행한 시문집 ≪허백당시집 虛白堂詩集≫ 3권과 ≪승가예의문 僧伽禮儀文≫ 1권이 있다.
참고문헌
- 『허백당시집』
- 『조선불교통사』(이능화, 신문관, 1918)
주석
-
주1
: 승려가 된 뒤로부터 치는 나이. 한여름 동안의 수행을 마치면 한 살로 친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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