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1800년대 후기에 건립된 반가로서, 이상익(李相翼, 1848∼1897, 호는 建齋)이 현재의 모습으로 건립하였다. 이 가옥은 이상익이 전라도 영암군수를 지낸 바 있어 택호를 영암댁(靈岩宅)이라고도 한다.
가옥은 마을 전면부 중심에 서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평지에 가까운 대지에 행랑채를 두고 그 안쪽에 ‘一’자형 사랑채와 ‘ㄱ’자형 안채, 그리고 부속채가 안마당을 가운데 두고 튼‘ㅁ’자집을 하고 있다. 사랑채 동측 중문을 거쳐 안마당에 들어간다.
안채 앞에는 중문간에서 곧바로 보이지 않도록 내외 사잇담이 있고, 그 북측에 ‘ㄱ’자 평면의 안채가 배치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각각 ‘ㄱ’자로 꺾여 안마당을 감싼 튼‘ㅁ’자형 배치를 하고 안마당의 트인 곳을 가로막듯이 좀 떨어져 곳간채와 나무간, 측소 등이 있고, 뒷편에 가묘가 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 사랑방을 두고 1칸 폭의 대청을 사이에 두고 동측에 또 하나의 사랑방(작은사랑)이 배치되어 있다. 서측 끝에는 누마루를 두었는데 결국은 마루와 방이 반복적으로 배치된 평면 구성이다.
사랑채 측면의 기둥 간살잡이를 보면 가운데 1칸을 정하고, 전후열은 반칸 씩 퇴칸으로 만들어 결국 측면이 2칸 넓이가 되었다. 정면 퇴칸과 동측면 퇴칸에는 마루를 놓았다. 막돌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웠다.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안채는 2칸통의 안대청을 중심으로 서쪽 부분에 안방과 웃방 부엌이 남북으로 길게 뻗었고 동쪽에는 건넌방이 있다. 안방 남측의 아래, 윗방과 마루방 한 칸이 모두 사잇장지로 구분되어 필요할 때는 전체를 개방해 넓은 안방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건넌방 앞의 누마루 밑에 아궁이를 두고, 부엌과 가까운 옆마당가에는 넓은 곳간채와 장독대를 두었다. 부엌 위의 다락과 부엌 채광, 환기를 위한 사롱살창이나 광창이 실용적이면서도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대문 밖의 넓은 작업 및 행랑마당이나 사랑채 전면과 오른쪽에 길게 뻗은 사랑마당과 정원, 그리고 안채 후원과 동편마당 등이 다른 곳보다 여유 있는 공간으로, 충청지방 반가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사랑채 앞의 정원은 처음 집을 지을 때 기본적인 구성을 했으나, 일제강점기 때 후손이 일본을 여행한 후 부분적으로 일본식 정원 기법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인 특징은 넓은 외부 공간을 그대로 두지 않고 침엽수와 활엽수를 대담하게 군식(群植)하여 자연스런 수목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록수를 주기적으로 손질하여 인위적으로 꾸민 일본식 정원과는 다른 모습이다.
내외담 밑으로 만들어진 수구(水口)를 따라 흘러 들어온 물은 완만한 곡선을 이루면서 1자 높이의 작은 폭포를 만들어 연못으로 떨어진다. 연못에 잠시 머물던 물은 남측의 담을 통해 밖으로 흘러 나간다. 수로의 양쪽에는 막돌을 자연스럽게 배열했고, 연못의 상류와 하류에는 작은 돌다리를 놓아두었다. 마치 축소된 자연경관을 보는 듯하다.
정원의 동측과 서측에 각각 하나씩 작은 정자를 배치해 두었다. 정원 중간에는 여러 가지 석물을 배치해 두었다. 이러한 정원의 꾸밈새를 통해 집주인의 자연주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