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0년(의종 24) 무신정권(武臣政權) 수립 후 집권 무신들의 토지 주1과 지방관리의 주2로 농민들의 생활이 궁핍하여지자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치열하게 일어났다. 전주에서 난이 일어나기 직전에도 관성(管城: 현, 충청북도 옥천군)과 부성(富城: 현, 충청남도 서산시)에서도 지방관의 탐학에 반발하여 민란이 일어났다.
전주 사록(司錄) 진대유(陳大有)는 자신이 강직하다고 자부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다. 그때 나라에서 정용보승군(精勇保勝軍)을 보내어 관선(官船)을 만들게 하였는데, 진대유는 상호장(上戶長) 이택민(李澤民)과 함께 역사(役事)를 심하게 독촉하였다.
그러자 1182년(명종 12) 3월 주현군(州縣軍)의 기두(旗頭) 죽동(竹同) 등 6명이 관노(官奴)와 불만의 무리를 모아, 진대유를 산사(山寺)로 내쫓고 이택민 등 10여 인의 집을 불태웠으며 판관(判官) 고효승(高孝升)을 협박하여 주리(州吏)를 바꾸었다. 안찰사(按察使) 박유보(朴惟甫)가 전주에 들어가자 죽동 등은 군세를 가다듬고 한편으로는 진대유의 잘못을 낱낱이 고하였다.
이에 안찰사는 진대유를 서울로 압송하고 도내의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전주성을 40여 일이나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정부에서 합문지후(閤門祗候) 배공숙(裵公淑), 낭중(郎中) 임용비(任龍臂) 등을 연이어 파견하여 난군을 타일렀고 그 과정에서 난군에 내부 분열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일품군(一品軍) 대정(隊正)과 승도(僧徒)가 죽동 등 10여 명을 살해함으로써 4월에야 난이 평정되고 잔당 30여 명도 처형되었다.
이 난은 지방관과 주리의 횡포에 반발한 주현군·관노·승도·농민들이 연합하여 봉기한 사건이었으며, 전 병력의 토벌에도 40여 일이나 버틴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난군이 매우 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