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0년(의종 24) 무신정권의 수립 후 집권무인들의 토지점탈과 지방관리의 가렴주구로 농민들의 생활이 궁핍하여지자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치열하게 일어났다.
전주 사록(司錄) 진대유(陳大有)는 자신이 강직하다고 자부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다. 그 때 나라에서 정용보승군(精勇保勝軍)을 보내어 관선(官船)을 만들게 하였는데, 대유는 상호장(上戶長) 이택민(李澤民)과 함께 역사(役事)를 심하게 독촉하였다.
그러자 주현군(州縣軍)의 기두(旗頭) 죽동 등 6명이 관노와 불만의 무리를 모아, 진대유를 산사(山寺)로 내쫓고 이택민 등 10여 인의 집을 불태웠으며 판관 고효승(高孝升)을 협박하여 주리(州吏)를 바꾸었다. 안찰사(按察使) 박유보(朴惟甫)가 전주에 들어가자 죽동 등은 군세를 가다듬고 한편으로는 진대유의 잘못을 낱낱이 고하였다.
안찰사는 진대유를 서울로 압송하고 난군을 타일렀으나 듣지 않았으므로, 도내의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전주성을 40여 일이나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난군에 내부분열이 생겨, 일품군(一品軍) 대정(隊正)과 승도(僧徒)가 죽동 등 10여 명을 살해함으로써 난이 평정되고 잔당 30여 명도 처형되었다.
이 난은 지방관과 주리의 횡포에 반발한 주현군ㆍ관노ㆍ승도ㆍ농민들이 연합하여 봉기한 사건이었으며, 전병력의 토벌에도 40여 일이나 버틴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매우 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